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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과 나

아주 작은 한 걸음, 접근하지 말고 다가가라.

by 스눕피 Apr 13. 2025


교수님과 나


스물일곱의 봄, 대학의 마지막 학기, 아껴두던 전공 필수 과목 하나를 수강했다. 강좌명: <포트폴리오>. 그것은 광고와 홍보를 전공하는 학생들이 취업을 위한 개인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정리하도록 돕는 실용 수업이었는데, 그 해엔 유명 독립 광고대행사의 부사장님이 겸임 교수의 역할로 해당 강의의 진행을 맡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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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개인적인 문제가 하나 생겼다. 수업은 뒷전, 교수님의 소박한 옷차림, 구수한 말투, 겸손한 태도에 반해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강의 중간중간 반전 매력처럼 터져 나오는 교수님의 날 선 생각의 차원을 너무나 닮고 싶어졌다. 난민 우려 전문 배우 정우성 형 식으로다가 멋진 직업. 멋진 어른. 화나요.


아! 친해지고 싶다.


접점을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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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봄날, 이맘때였을까.


강의 시작이 한참 남은 시간에 교수님이 강의실 구석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어두고 그날의 수업을 미리 준비하고 계셨다. 나는 캠퍼스에 친구 하나 없는 늙수그레 막학기 대학생이었고, 수업 시간 전에 강의실에 미리 도착해 중도에서 빌린 소설을 읽거나 딴짓(힙합 음악 듣기)에 열중하는 생존형 루틴을 만든 터였기에 우리는 그렇게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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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기회야.


나는 용기를 내어 교수님께 다가가 차분히 인사를 드렸다. 그랬더니 교수님은 대뜸 내게 담배를 태우느냐고 물으셨다. "아뇨, 그런데 교수님과 같이 나가고 싶습니다!" 나는 평소의 나답지 않은 상냥한 주접과 아양을 떨었다. 못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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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진 봄날의 캠퍼스, 연초에 불을 댕긴 교수님이 내게 이름이 뭐냐고 물으셨다. 나는 내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교수님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시더니 자네가 보내 준 자기소개서를 상당히 인상 깊게 읽었다고 말씀하셨다. 수업의 중간 과제였던 학생들의 자소서를 꼼꼼히 읽어보신 모양이었다. 이렇게 멋진 어른이 나의 이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기분이 쾌했다.


이것이 성덕의 삶인가? 엉엉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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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은 자기소개서 작성 과제에 대한 본인의 한줄평이 담긴 쪽지를 수강 학생들에게 한 장씩 나눠주셨다. 이내 내 이름이 불렸고, 나도 쪽지를 받아 쥐었다.



글도 좋고,
생각도 좋아요.

원하는 길로 가시되,
중간에 삐걱이면
그때 다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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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가 마냥 어색한, 갈 곳 없는 현업 출장 교수님과 친구 없는 스물일곱 복학생의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설명하면 너무 낭만적인 미화일까 싶지만, 아무튼 그날 이후로 교수님과 나는 친해졌고, 어쩌다 보니 대학 졸업 후에도 연락하는 사이가 됐다.


졸업 직후에는 지원 회사에 떨어지면, 뭐 자랑이라고 탈락을 알리는 문자를 시시콜콜 보내기도 했는데, 이제와 돌아보면 참 눈치도 없고 버릇도 없었던 것 같다는 부끄러운 마음에 참회의 눈물이 다 난다.


"중간에 삐걱이면 그때 다시 보자"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철도 없고 센스도 없던 그때의 나를 도대체 어찌하리오.


좀 맞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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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의 마지막날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교수님은 광고와 소비자와의 관계를 설명하며 <접근하지 말고 다가가라>라는 인상적인 메시지를 소개하셨다. 쉽게 말해 빤히 보이는 의도와 목적의 낯뜨거움을 경계하라는 것. 다시 말해 달리 피하거나 숨길 수 없는 일과 맞닥뜨렸을 때에도, 더 나은 방식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한 번 더 기울이라는 이야기였다.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는 ‘성공한 작가’와 ‘아직 성공하지 못한 작가’의 차이를 두고, 자신이 나아갈 수 있었던 <아주 작은 한 걸음>이라고 애틋하게 표현했다. 그러면서 성공을 원하는 작가라면 그 한 걸음이 얼마나 작은 차이였는지를 알고 있고, 또 알아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2016년의 봄날, 그날의 나는 교수님께 다가갔던 걸까 접근했던 걸까.


나는 분명 정답을 알고 있지만, 오늘만은 나를 위해 한 번만 더 뻔뻔하게 눈 감아주기로 한다.


작고 소중한 한 걸음을 더 내딛으며 누군가에게 진실되게 ‘다가가는’ 사람이 될 것을 스스로 진지하게 다짐하면서.


선생님, 오랜만에 전화드리겠습니다. 쩝.



■ 오늘 함께 듣고 싶은 노래

"온종일 비가 온 날은 하얀 얼굴로 그대를 만나리. 오랜 허물 모두 비우고 그대를 내 맘에 담으리.""온종일 비가 온 날은 하얀 얼굴로 그대를 만나리. 오랜 허물 모두 비우고 그대를 내 맘에 담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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