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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a Aug 30. 2022

발리에서 눈뜬 한국의 맛

우리 한식 좋아했네




 저녁 메뉴는 제육볶음과 된장찌개로 정했다. 발리 마트에서 고기 자르는 분이 제육볶음용 고기를 알 턱이 없다. 얇게 잘라줄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커다란 목살 한 덩이를 삼등분해서 주겠다길래 고이고이 받아 들고 돌아왔다. 고기 자르는 것부터 수작업이라니 해외에서 만드는 한식은 이렇게나 어렵다. 얇게 썬 돼지 목살 (600그램=5,800원)에 고춧가루, 고추장, 설탕, 양파, 대파, 다진 마늘, 간장, 매실액을 넣고 잘 버무린 후 두 시간 정도 재운다. 고기에 간이 배는 동안 된장찌개를 끓인다. 멸치육수에 된장, 고추장, 고춧가루를 풀고 단단한 채소 (감자-호박-양파 순)를 먼저 넣고 끓인다. 다진 마늘과 고추, 파를 썰어 넣고 두부를 넣어 팔팔 끓이면 완성이다.


발리 두부는 시큼한 냄새가 난다. 더운 날씨 때문에 시큼한 보존료가 들어가는 건지, 첨가물이 다른 건지 모르겠다. 현지 두부는 보통 500원 정도면 구매할 수 있고 한국 두부는 2,000원-5,000원 정도에 구매가 가능하다. 한국 두부를 사고 싶을 땐 꼭 한국 마트로 가야 한다. 장 보러 자주 가는 마트에서 제일 비싼 두부는 4,000원 정도인데 500원짜리 두부와 맛이 비슷하다. 양념이 강한 조림이나 찌개에 넣을 땐 500원짜리 신 두부를 사도 충분하다. 찌개를 불에 올리고 약불로 뭉근하게 끓이는 동안 달걀말이를 만든다. 오늘의 밥 당번은 나다. 곁들일 반찬으로 한국식 달걀말이를 만든다. 달걀 4개, 양파 1/2, 대파 조금, 당근 1/4, 소금 설탕 약간 넣고 잘 섞은 뒤 달군 팬 위에 부어 살살 만다. 한 김 식힌 뒤 자르면 단면이 깔끔하게 잘린다.


주영이는 인생 절반을 일본에서 살았다. 내가 발리에 오기 전까지는 집에서 한식을 만드는 일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한식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서로 번갈아 밥 당번을 하며 요리할 때마다 궁금한 것들을 물어본다.

"일본식 달걀말이는 조금 더 정성이 들어가지?"

팬도 달걀말이용 팬을 따로 사용하고 알끈도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몇 번이나 체에 거른다고 한다. 채소 같은 것은 전혀 넣지 않고 얇게 돌돌 만 달걀말이다. 언젠가는 주영이가 일본식 달걀찜을 만들어줬는데 일식집에서나 먹어봤던 보들보들한 달걀찜을 한입 떠 넣는 순간 입안에 촉촉한 달걀찜이 부드럽게 퍼지면서 와 이런 걸 당장 배우고 싶다 생각했다.


집에서 밥 만들기를 좋아하는 나는 지금 이곳에서 속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좋아하는 냄비도, 그릇도, 오븐도, 전자레인지도 없는 상황에서 하루에 두 번씩 밥을 만든다는 것에 자꾸 스트레스를 받았다. 간이 안된 음식을 좋아하고, 편식을 하고, 떡볶이를 제외한 다른 음식을 좋아하지도 않으니 한국에선 외식도 자주 하지 않고 살았다. 한 가지 메뉴에 꽂히면 일주일 내내 그 메뉴만 먹을 수도 있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내가 먹고 싶은 때에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혼자 사는 것의 최대 장점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쌀밥을 자주 먹지 않으니 김치도 필요 없었다. 그런 내가 지금 발리에서 친구와 친구 남편과 친구의 아이와 매 끼니 함께 밥을 만들고 한국인은 밥심이라며 각종 한식을 만들고 있다. 청국장을 직접 띄우고, 단감 껍질을 얇게 까 곱게 말린 곶감을 만들어내는 친구와 함께 매일 음식을 만든다. 한밤중에 직접 담근 깍두기로 다이어트 중인 친구를 살살 꼬셔 컵라면을 먹게 만들 땐 김치 안 좋아하는 너를 유혹하는 것에 성공했다며 뿌듯하기까지 했다. 친구가 좋아하는 닭볶음탕을 만드는 날엔 냄비를 끌어안고 고젝 타고 달려가서 함께 저녁을 먹는다. 남은 국물까지 싹싹 긁어 밥까지 비벼먹고 나면 여기가 한국인지 발리인지 헷갈리게 입이 맵다. 어느 날 겉절이를 만들겠다고 배추를 절이는 시간 동안 나란히 누워서 둘이 깔깔거리며 이야기했다. 우리 이렇게까지 한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어? 아마도 함께 했기 때문에 더 소중했던 한국의 맛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수돗물로 설거지를 한다고 해서 껄끄러울 일이 없지만 여기선 다르다. 수돗물로 설거지를 하고 자연건조를 시키면 말끔히 마른 그릇에 하얀 얼룩이 보인다. 수돗물을 받아 컵에 담아두고 시간이 지나 확인해보면 컵 아래 낯선 가루들이 깔려있는 게 보인다. 이미 눈으로 본 게 있는데 수돗물로 씻은 과일을 그냥 먹을 수 없다. 정수기 물로 한번 더 헹궈야 안심이 된다. 외식할 땐 항상 걱정을 한다. 이 요리는 어떤 물로 만든 걸까? 장이 예민한 사람이 커피를 마시고 배탈이 나는 걸 보며 얼음이 지저분할 수도 있겠구나 싶다. 매일매일 입에 들어가는 것들과 전쟁을 하는 기분이다. 여행자일 때는 신경도 안 썼던 것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 작은 와룽 (식당)에서 파란색 플라스틱 버켓에 담긴 구정물로 접시를 헹구는 걸 목격한 뒤로 더욱더 열심히 집에서 밥을 만들게 되었다.  


다행히도 내겐 집에서 밥 만들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고, 언제나 나를 반겨주는 친구의 가족이 있다. 식구(食口)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제 나는 일 년 동안 매일 함께 밥을 만들고, 맛있는 걸 먹을 때면 저절로 서로의 얼굴이 떠올라 메시지를 보내게 되는 사람들이 생겼다. 평상시 잘 쓰지도 않던 식구라는 단어를 찬찬히 곱씹어 새겨본 날들이었다.


매일 함께 밥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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