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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a Sep 04. 2022

법랑 그릇에 차곡차곡 담는 이야기들

 온 세상 귀엽고 쓸데없는 걸 다 모으는 우리 집에는 별의 별게 다 있다. 레고 미니 피겨, 플레이모빌, 곰돌이 푸우 책, 베이킹 도구, 리본, 엽서, 실바니안 같은 것들이 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외에도 잡다하게 모으는 물건 중에는 피크닉 소품과 도시락통이 있다. 처음 도시락통을 모으기 시작한 건 런치 박스라는 인도 영화를 재밌게 보고 나서부터다. 발리우드의 도시 뭄바이의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배달받는다. 개중에는 집에서 싼 정성스러운 도시락을 받는 사람도 있고, 여건이 되지 않아 식당에서 도시락을 배달시키는 사람도 있다. 영화에서도 언급되지만 뭄바이의 도시락 배달부들은 하루에 5,000개의 도시락을 배달하는데 그중 도시락이 잘못 배달될 가능성은 0.1%라고 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도시락 배달부들이 한치 오차도 없이 그 많은 도시락을 정확하게 배달한다는 게 신통해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도시락 배달 장면에서는 저절로 입이 딱 벌어진다.


외도를 하는 남편에게 정성스러운 점심을 보내 마음을 돌리고 싶은 일라의 도시락이 어느 날 0.1%의 배달 사고에 휘말린다. 부인과 일찍 사별하고 조기 퇴임을 하고 싶은 권태로운 직장인 사잔은 잘못 배달된 도시락을 받아 들고 난감해하지만 오랜만에 받아본 정성스러운 도시락에 마음이 설렌다. 지루한 일상과 매일 식당에서 배달시키는 시시한 도시락이 무료하기만 했던 사잔은 이제 출근이 기다려진다. 도시락이 잘못 배달됐다는 걸 알아챈 일라 또한 누군가 자신이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줬다는 것이 기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도시락통으로 전달되는 편지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호감을 갖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영화는 잔잔하고 담담하게 흐르는 일상 같은 느낌이다. 집에서 먹는 느긋한 저녁처럼 여유 있고, 정성스럽다. 때론 잘못탄 기차가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 주기도 한대요라고 마무리하는 이 영화를 보고 영화 속에 나오는 티핀 박스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마침 취미가 소풍과 캠핑이니 도시락통을 사모아도 된다는 그럴듯한 명분이 있다. 해외 사이트에서 직구할까 싶어 온밤을 꼬박 새 가며 뒤져도 보고 호주 여행 중 찾아간 인도 마트도 다 뒤졌는데 투박하고 커다란 티핀 박스뿐이다. 몇 년째 찾아 헤매던 꿈속의 티핀 박스를 포기하고 있었는데 친구네 동네 근처에 법랑 그릇과 도시락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다는 것 아닌가.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간 그릇가게는 예상보다 규모가 컸다. 온 세상 그릇이 다 여기 쌓여있는 것 같다. 내가 찾던 인도 도시락통은 없지만 화려한 색감의 법랑 그릇들과 도자기 식기들이 매장 가득 진열돼있는 걸 보기만 해도 심장이 뛴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그릇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한쪽 구석에 진열된 접시 위에 낯익은 그림들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토끼, 피터 래빗 이야기를 만든 영국의 동화 작가 베아트릭스 포터의 동화속 주인공들이다. 우아한 모자를 쓰고 포근한 숄을 걸친 제미마 퍼들덕 부인과 파란 옷을 입은 고양이 톰 키튼, 낚시를 좋아하는 멋쟁이 신사 제레미 피셔까지! 아픈 어린이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따뜻한 동물들 이야기, 피터 래빗과 친구들이 접시 위에 있다. 그림을 고르고 골라 법랑 그릇, 에스프레소 잔들을 세트로 맞췄다. 신나게 그릇 고르는 걸 지켜보던 직원이 도시락통 같은 것을 하나 내밀었다. 소토 아얌 (닭 국)을 담는 통이라고 했다. 국통 한가운데 제미마 퍼들덕 부인이 있으니 안 살 수 없다. 오후 티타임의 디저트를 올리고 소꿉놀이를 하고 싶은 낭만적인 그릇들을 잔뜩 골랐다.


발리에 거주한 지 27년째라는 일본인 사장님이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말하면 안 된다며 직접 만든 천가방에 그릇들을 담아주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시간 낮에 산 그릇들을 펼쳐놓고 감상하고 있는데 재영 오빠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방에서 동화책을 몇 권 들고 나왔다. 피터 래빗 작가의 무려 초판본 동화책이라니. 이 오래된 동화책들은 친구가 일본 빈티지 숍에서 초창기 판본을 발견하고 적지 않은 금액으로 구매한 것이라고 했다. 비록 도시락통은 오늘도 못 샀지만 이야기가 잔뜩 담긴 특별한 그릇을 갖게 된 것만 같아 뿌듯하다.


 제미마 퍼들덕 부인이 그려진 국통은 어느 날은 닭볶음탕을 담아 스미냑으로 가기도 하고, 어느 날은 소고기 채소죽을 담아 우붓에 가기도 했다. 아픈 친구에게 죽을 담아 보냈던 날 저녁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하나야. 여기 죽그릇 뚜껑이 원래 깨져있었나? 아무래도 내가 설거지를 하다 떨어뜨리면서 이게 깨진 것 같아."

설거지 당번 재영 오빠가 아무래도 그릇을 떨어뜨렸나 보다. 오빠는 그릇을 잘 깬다. 친구가 직접 만든 도자기 접시도 많이 깨 먹었다. 표정을 보고 있지 않아도 지금 저 착한 오빠가 얼마나 곤란해할지 짐작할 수 있다.

"괜찮아요. 어차피 소모품이니까 상관없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라고 했지만 마음 약한 재영 오빠가 이런 일을 그냥 넘길 리 없다. 며칠 후 기어이 새 뚜껑을 찾으러 그릇가게에 다녀오면서 피터 래빗이 그려진 동그란 접시를 함께 선물로 주었다. 한쪽이 깨져서 슬슬 녹이 올라오는 뚜껑도 결국 버리지 못하고 한국까지 들고 왔다. 나중에 이걸 들고 캠핑이나 소풍을 갔을 때 누군가 "어 여기 깨졌다."라고 말하면 어 이거는 발리에서 설거지를 엄청 열심히 하는 오빠가 있는데 설거지하다가 이걸 떨어뜨린 거야 라며 재미난 이야기라도 되는 양 신이 나서 설명할 수 있을 테니 나에게는 새로운 뚜껑에 덤으로 귀여운 접시와 즐거운 에피소드까지 생긴 셈이다.



크로보칸 법랑 그릇가게, 오래된 동화책
골든 래빗 법랑 그릇




크로보칸 가구 거리에 있는 라탄 가게. 근처에 가구점이 많아서 구경할 게 많아요. 이 가게는 도매를 겸하고 있어 가격이 저렴하고 물건이 많답니다. 법랑 그릇 가게도 이 근처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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