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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a Sep 07. 2022

내가 발리에서 전을 부치고 있다니

게다가 인견 원피스를 입고

 처음부터 이렇게 거창하게 명절 음식을 할 생각은 아니었다. 친구 부부가 한국을 떠난 후 17년 동안 명절 음식을 먹어본 적 없다는 말에 그럼 전이라도 몇 개 부쳐볼까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명절 음식 이름 대기 경쟁이라도 하듯 추석에 먹는 음식 이름을 서로 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굴비, 사과, 배 이런 것까지 등장해서 우리는 제사 지내는 것이 아니라며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불고기, 잡채, 전 몇 종류, 나물 몇 가지를 만들어 추석 분위기를 내보기로 했다. 어린이는 난생처음 추석 음식을 접하는 것이니 알 수 없는 사명감마저 생긴다.


 우리 집은 전 부치기를 시작하기 전에 슈퍼마리오 캐릭터들처럼 버섯을 먹고 힘을 낸다. 자연산 송이버섯이라고 하던가 여하튼 귀하다는 버섯을 세로로 갈라 참기름 두른 소금에 찍어먹고 전을 부친다. 이렇게 비장하게 보양식까지 챙겨 먹으며 전을 부쳐서 다 식혔다가 다음날 먹어야 한다는 건 이상하다. 심지어 온 국민이 각자의 집에서 다 같은 날, 같은 음식을 하고 있는 것도 신기하다. 엄마와 전을 부치기 시작한 게 몇 살 때부터였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매번 허리가 아프도록 전을 부치고 나면 심술이 바짝 올라서는  

"우리 이제 이렇게 많이 하지 말자. 엄마도 힘들고 나도 힘들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먹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 나눠주고는 결국 냉동실로 들어가잖아."

라며 투덜댄다. 엄마는 그래도 명절인데 전을 안 부치면 서운해서 안된다고 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저 명절 전날의 대화는 내가 발리에 오기 전에 멈췄다. 엄마는 지금 혼자 전을 부치고 있을까.


 그렇게 지긋지긋했던 전 부치기를 내가 먼저 하자고 하다니. 그것도 이렇게 더운 나라에서 말이다. 장을 보는 내내 이 상황이 재밌기만 하다. 장보기를 마치고 재료를 손질한다. 기름이 튈까 봐 못쓰는 천을 돗자리 삼아 깔고 커다란 전기그릴을 달군다. 옷에도 기름이 튈까 갈아입는다. 친구와 내가 집에서 주로 입고 있는 건 검은색, 갈색 인견 원피스다. 한국에서 오빠네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옷이다. 사랑하는 며느리 더운 나라에서 시원하게 입으라고 발품을 팔아 골라 보내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감동적인 것과 별개로 어른들이 좋아하는 인견 특유의 느낌과 집안일하기 편한 노골적 디자인이 너무 재밌어서 택배 상자를 여는 친구 옆에서 배를 잡고 웃었다. 웃다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친구가 "너도 색깔 하나 골라봐. 같이 입자." 해서 그날 이후 인견 원피스는 우리의 유니폼이 되었다. 유니폼까지 갖춰 입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전을 부친다. 돼지고기, 두부 반모, 채소 다진 것, 달걀 4알에 소금으로 간을 해서 반죽을 만들었다. 스미냑 근처에서 깻잎을 사려면 파파야 마트에 가야 하는데 우리는 오늘 다른 마트에서 장을 보는 바람에 아쉽게도 깻잎전은 못 만든다. 대신 커다란 고추를 사서 고추전을 만들었다. 전을 부칠 땐 팬이 충분히 달구어진 다음 기름을 두르고 중간 불, 약불 번갈아 조절하며 천천히 익힌다. 달구어 지지 않은 팬에 기름을 올리거나 낮은 온도에서 재료를 올리면 기름을 많이 먹어 전이 더 느끼해질 수 있다. 전 부치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깔끔하게 부칠 수 있는 순서대로 일을 한다. 먼저 호박전을 부치고, 고추전을 올리고, 동그랑땡을 부친 뒤 마지막에 생선전을 부칠 것이다. 비린내 나는 생선전은 늘 맨 마지막 순서다. 이중 동그랑땡 부치는 게 제일 지루하다. 동글동글 모양을 잡아야 하고 부서지지 않도록 한쪽 면을 잘 익힌 뒤에 뒤집어야 한다.


 뭐든지 아기자기하고 정성스러운 걸 좋아하는 친구는 호박에 동그란 쿠키커터로 구멍을 내 새우를 끼운다. 나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일들을 열심히 하는 친구에게서 늘 배울 점이 많다. 나 역시 무언가를 조금 더 정성스럽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발리에는 단단한 초록색 주키니가 많아서 한국에서 먹는 애호박 같은 건 찾기 어렵다.  애호박과 주키니는 같은 이름이지만 정말 맛이 다르다. 마트 구경이 취미라 늘 온 동네 마트를 돌아다니며 찾아보고 있지만 한국처럼 단맛이 많은 애호박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아예 없을 수도 있다. 주키니는 식감이 조금 더 아삭아삭하고 단단하다. 전을 부친 후에도 꾸준히 아삭아삭하다. 새우를 작은 동그라미에 욱여넣으려니 새우가 자꾸 허리를 편다. 애써 집어넣으면 허리를 펴고 다시 튀어 오르는 새우 때문에 몇 번 웃음이 터졌다. 같은 반죽을 씨를 파낸 고추에 채워 넣어 고추전을 부친다. 남은 반죽으로는 동그랑땡을 부친다. 각 가정마다 동그랑땡 레시피가 다르긴 하지만 우리 집 동그랑땡은 더 특이하다. 어릴 때 모든 동그랑땡이 다 이런 줄 알고 살다가 성인이 된 후 SNS에 올라오는 다른 집 동그랑땡을 보고 놀랐다. 다른 친구들도 우리 집 동그랑땡을 보고 놀랐다. 보통 고기를 많이 넣은 반죽에 밀가루, 달걀물을 입혀 부쳐내는 집이 많은데 우리 집은 그냥 저 반죽을 동그랗게 모양내 부친다. 고기도 적게 들어간다. 두부랑 달걀, 채소를 많이 넣어서 고기만 넣은 동그랑땡보다 부드럽다. 입맛이라는 게 길들여지기 나름이라 여전히 나는 촉촉한 우리 집 동그랑땡을 더 좋아한다. 친구는 명절 음식을 만드는 것 자체가 처음이니 우리 집 식대로 만든 동그랑땡만 기억할까 봐 다른 집 동그랑땡은 어떻게 만드는 지도 이야기했다. 친구와 함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전을 부치니 지루한 시간도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이제 생선 전만 부치면 전 부치기가 끝난다.


 생선전은 '도리'라는 인도네시아 흰 살 생선으로 대체해서 만들었다. 마트에 가면 손질된 도리를 판다. 슬라이스는 집에 와서 했다. 생선을 얇게 썰어줄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삼등분해서 주면 되냐고 하길래  "그냥 제가 할게요." 하고 가져왔다. 도리는 동태보다 조금 더 물컹하고 부드럽다. 식감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소금 후추 간해서 달걀 입혀 부치면 그럴듯한 생선전이 된다. 드디어 전을 다 부쳤다. 우스갯소리로 "제가 발리에 와서 인견 원피스를 입고 명절에 전을 부치고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해봤어요." 했지만 특별하고 재미있는 경험이다. 해외에서 한식을 만들려고 바둥바둥하는 것도 생각보다 꽤 재밌다. 평상시에 잘 안 해 먹던 것들을 여기 와서 굉장히 열심히 만들고 있다. 결국 기름 냄새에 질린 친구와 나는 저녁을 뜨는 둥 마는 둥 했지만 한국을 떠난 뒤 처음 명절 음식 저녁상을 보는 오빠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오빠의 기쁜 표정과 더불어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맞는 명절 저녁이 마냥 즐겁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도 싹 잊고 덩달아 기뻐지는 걸 보니 우리는 이제 정말 가족 같은 무언가가 됐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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