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꿈이 주는 고통과 현실의 승리
한편의 꿈은 이따금 현실보다 더 선명한 메세지를 남기곤 한다. 내게는 몇십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그날의 공포와 함께 생생히 기억되는 악몽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 그리고 나 자신을 재정의하게 만든 한편의 기묘한 전시회였다. 공포와 함께 생생히 기억되는 악몽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 그리고 나 잔신을 재정의하게 만든 한 편의 기묘한 전시회였다.
꿈속 나는 기이한 전시관에 서 있었다. 그곳의 사진들은 평범해 보였지만, 뚫어져라 들여다보면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 장면을 체험하는 마법같은 곳이었다.
첫 발걸음이 닿은 곳은 '한 여름밤의 캠핑'이었다. 모기향 연기 속,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두 남녀. 궁금함에 소리에 귀 기울이는 순간, 현실보다 더 거대한 모기떼의 습격이 시작됐다. 징그럽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자 몸부림치자, 눈을 감는 순간 나는 아까의 전시관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땀을 애써 모른 척하며 전시관을 배회했다. 나는 전시관을 돌아다니는 행위가 현실이라 착각하고 있었지만, 이를 일깨워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프로그램된 로봇처럼,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다음 그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두번째 마주한 작품은 '노을빛 바다'였다.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노을빛이 바다를 감싸며 나를 부르는 듯 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곳만은 절대로 들어가선 안 된다는 것을. 발을 땐 찰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내 몸은 전시관 천장에 닿을 듯이 강제로 떠올랐다.
"저긴 진짜, 안돼..!"
나의 비명은 무의미했다. 육체는 마치 꼭두각시처럼 검은 기운이 휘감는 그림 앞으로 강제 이송되었다. 온몸을 비틀며 그림을 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나약한 몸부림은 허공을 갈랐을 뿐이다. 그토록 피하려 했던 이 그림은 '위험'이라는 신호를 보내 오고 있었다.
억지로 들어오게 된 그림 속 세상은 의외로 평화로워 보였다. 검은 배경 위에 초록 잔디가 작은 원을 이루고 있었고, 그 중앙에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자리한 간단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 고요함 속, 배경과 하나 된 듯 검은 아우라를 띠는 '어떤 것'. 두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나를 잠식할 것 같은 그 형체들이 나무 옆에 도사리고 있었기에, 유일한 색채인 그곳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저것들은 날 죽일 거야. 시선을 돌렸을 때 도망쳐야 해. 기회는 지금 뿐이야!'
애석하게도 나는 그림 안에서 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나무 너머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저항했다.
그때였다.
-팟
차가운 현실의 공기가 폐부까지 스며들며 동시에 황금빛 한 줄기가 눈꺼풀을 뚫고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형체가 잡혔다. 따스함이 온몸을 감쌌지만, 동시에 코끝을 스치는 소독약 냄새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지친 몸을 그 빛에 맡기는 순간, 바닥에 깔린 병원 시트의 거친 감촉이 손바닥을 스쳤다. 아, 현실이었다. 시간의 터널을 지나 겨우 현실로 밀려 올라온 듯했다.
흐릿한 시야 속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아빠야, 알아보겠어?"
유리창에 소린 김처럼 뿌연 형상 속에서 겨우 윤곽을 알아볼 수 있는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아. 엄마다. 나 살아있는 건가, 다행이다.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엄마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을까.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써 웃음짓는 얼굴이 불편했다.
"왼손이... 움직이지 않을텐데, 괜찮아?"
엄마의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는 걱정이 뼈아팠다. 아, 맞다. 꿈 속에서 그렇게나 피하고 싶었던, 꼼짝할 수 없던 몸의 무게가 현실의 왼손 마비 그대로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엄마 괜찮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 그 한마디는 꿈속 그 검은 그림자들로부터 내가 나를 구해낸 것처럼, ㅎ현실의 나에게도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주문처럼 울려 퍼졌다. 방금 수술 끝내고 눈을 뜬 내가, 엄마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수술 후 정신없이 보낸 시간 속 잊고 있었던 그 꿈. 나는 지금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해 본다. 그때 꾸었던 꿈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십몇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서려있는 그날의 공포심과 두려움이 가끔 나를 덮쳐온다. 그 검은 형체들은 저승사자였던 걸까, 나를 짐어 삼키려 했던 죽음의 기운이었을까. 이유도 없이 떨어진 그 전시관은 어쩌면 내 인생 전반을 보여주는 주마등이 아니었을까.
부모님도, 나라는 자아도 잊은 채. 결국 순리대로 될 것이라고 압박해 오는 그 공간이 나를 집어삼켜 먹었다면면, 그날 눈을 떴을 때 나는 부모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아니, 영원히 그 어둠에 잠식되어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난 그때 눈을 떠 부모님을 알아보았고, 숨을 쉬며 살아있다. 그 정체 모를 것들에게서 내가 이긴 거다.
이 생각들이 모두 지나간 일이니 쓸데없을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내겐 결코 아니다. 가끔 인생을 살다가 이룬 것 하나 없다고 생각이 들 때면 이 악몽을 상기시킨다. 난 그 고통과 악조건에서 버텨냈고, 기어이 깨어났으니, 이보다 더한 승리가 더 또 있을까. 비록 꿈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것'에게 이겼기 때문에, 다시 주눅 들 필요 없다고 나 자신에게 작은 위로가 돼주었기에,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일지라도 앞으로 자신감이 없을 때마다 복기하며 축배를 들 것이다. 비록 남들이 별것 아닌 취급을 하더라도, 본인이 그렇다는데 누가 감히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쓸데없는 생각이 당신을 바꿀 수 있었다면, 그건 이미 가치가 있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