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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Aug 24. 2022

나는 너의 탄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

숨은 제주를 발견하는 재주 6 - 하논

아빠와 딸은 제주의 논길을 걷고 있었다. 뒤따라오던 딸이 갑자기 조용하길래 뒤를 돌아보니 딸이 자기 머리보다 큰 돌을 수로에 던지고 있었다. 잠시 후, 그 돌은 물 위로 떠올랐다.


2년 전, 누군가가 위의 글을 실제 겪은 일이라고 썼다면 나는 2가지 의문을 재기했을 것이다.

첫째, 제주에도 논이 있나요? 둘째, 자기 머리보다 큰 돌을 아이가 가볍게 들어 던졌다? 그런데 그 돌이 물 위로 떠올랐다구요?

하지만 지금은 의문을 재기하지 않는다. 위의 글은 실제로 내가 작년에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의문부터 풀어보자.


Q. 제주에도 논이 있나요?

A. 있다. 이름은 하논이다. 내가 알기로는 현존하는 제주도 유일의 논이다. (대학교 때 농활을 갔던 종달리에도 논이 있었는데, 지금은 논농사를 지 않는 것으로 안다)

이게 바로 논 뷰 클라스.

중학교 때 지리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언젠가 사람들이 하논의 가치를 깨닫는 날이 올 거라고. 그땐 하논의 이름과 위치조차 아는 이가 극히 드물었으니 그때에 비하면 하논의 위상이 높아지긴 했다. 하논분화구방문자센터가 설립되고 하논으로 내려가는 데크 시설마련 것만 보더라도. 하지만 아직제주에 살면서도 하논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이런 대접받을 곳은 아닌데...

그래서 나라도 하논의 진면목을 알고자 글을 쓴다. 다시는 이곳에 야구장을 짓겠다느니 하는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2000년대 초반에 하논에 야구장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환경 단체의 반발로 무산된 바 있다.)


하마터면 이곳이 야구장이 될 뻔했다

하논의 정체성부터 분명히 하자. 하논은 논이기 전에 분화구다. '논인데 분화구이기도 하다' 보다는 '분화구를 논으로 활용해왔다'가 더 적합한 표현이겠다. 하논은 유일무이라는 수식어를 여럿 보유하고 있는데, 일단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논농사가 이뤄지는 곳이고, 국내 유일의 '마르(maar)형' 분화구다.

마르형 분화구는 용암 분출로 생된 일반적인 화산 분화구와 달리 지하의 가스 또는 증기가 폭발하여 생성된 분화구를 말한다. 5만 년 전 폭발한 화산 분출의 영향으로 이곳에 최대 수심이 10m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구호(화산 분화구에 물이 고여 만들어진 호수)가 만들어졌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상상도


이후 퇴적물이 화구호 주변에 쌓이면서 두터운 토양이 형성되었고 수심이 낮아지면서 지금과 같은 습지 형태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하논에 흐르는 용천수. 용천수는 지하에서 솟아나 천지연으로 흐른다.


하논의 학술적 가치는 분화구가 이탄습지(泥炭濕地, Peatlands)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도드라진다. 이탄습지는 자연 상태에서 생물체를 부패시키지 않고 장기간 동안 보존할 수 있는 습지를 말한다. 하논의 이탄습지에는 물질을 썩게 하는 미생물이 부족해 꽃가루 등의 다양란 식물들이 시대별로 퇴적되어 있는데, 이를 조사하면 각 시대의 식물 정보를 알 수 있다한다. 뿐만 아니다. 하논분화구의 습지 퇴적물에는 동아시아에 언제 비가 많이 왔는지, 무슨 식물이 살았는지, 지진이나 화산이 있었는지 등의 정보도 들어 있다고 한다.

[오마이뉴스 2005.12.12 '5만 년 전 한반도 비밀 간직한 제주 하논 분화구' 기사 참조] 

하논이 생태계의 타임캡슐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제 두 번째 의문을 풀어보자.


Q. 다섯 살짜리 아이가 자기 머리보다 큰 돌을 들어서 던졌다구요?그런데  돌이 물 위로 떠올랐다구요?

A. 네. 실제로 제가 겪은 일입니다.


그날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그날은 두 딸과 함께 하논으로 모험을 떠난 날이었다. 두 딸과 논길을 걷고 있는데 둘째(다온)가 안 보여 뒤를 돌아봤다. 나는 뒤를 돌아보자마자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 다온이가 자기 머리보다 큰 돌을 번쩍 들어서 논길 옆 수로로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온!가만히 있는 돌은 왜 던져?"

사실 그때는 다온이를 다그치느라 방금 벌어진 일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장면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바로 그때, 방금 전 다온이가 던진 돌이 물 위로 떠올랐다. 내가 뭘 거지?믿을 수가 없어서 나도 주변에 있던 돌멩이를 들어 수로에 던져봤다. 잠시 후 그 돌도 물 위로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돌의 무게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제야 다온이가 자기 머리보다 더 큰 돌을 가볍게 들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돌은 부석이었을 것이다. 용머리 해안에 가면 기념품 가게 앞에서 팔던 '물에 뜨는 돌'. 돈 주고 사야 하는 신기한 돌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하논이 꽁꽁 숨겨놓은 탄생의 비밀을 한 꺼풀 벗긴 느낌이었다. 이 땅 속에는 얼마나 많은 지질학적, 생물학적 비밀들이 숨어까?



논농사가 가능했다는 건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뜻이기도 하니 역사의 비밀도 겨져있을 것이다.  옛날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척박한 제주의 땅. 하논의 습지를 보고 논농사의 가능성을 발견하여 처음 이  벼를 심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주변 마을 사람들처럼 밭농사를 시작하는 게 훨씬 편한 선택이었을 텐데. 씨앗 어떻게 가져왔을까?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길을 간다는 건 절반의 실패 가능성을 담보한다. 그에게도 이는 거대한 모험이었을 것이 그 또한 불안했을 것이다.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매일 아침 이곳으로 나와 벼가 잘 자라는지 확인하며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마음이 갈팡질팡했을 그를 떠올린다. 실패의 두려움을 딛고 첫 수확물을 얻어냈을 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당신 덕분에 수세기가 흘렀는데도 하논에서는 논농사가 풍년이. 하논에서 돌아오는 길, 가만히 앉아 논을 바라봤다. 유난히 올해 벼는 초록이 다. 가을이면 벼를 수확하며 흐뭇해할 농부의 얼굴이 떠올라 내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올 가을엔 하논에서 수확된 쌀을 먹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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