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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Oct 12. 2022

뜨거웠던 어제 내가 범인

숨은 제주를 발견하는 재주 9 - 군산오름

돌이켜보면, 그것은 하프타임 쇼였다. 내 인생의 후반전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하프타임 !


슈퍼볼 하프타임 쇼보다 더 화려한 쇼가 펼쳐진 곳은 군산 오름이었다. 그날 나는 세상에 없던 여행사를 만들어 보겠다던 꿈을 현실화고자 '사전답사' 여행을 떠난 터였고, 행의 마지막 코스가 군산오름이었다. 군산 오름 정상 위의 널따란 바위에 걸터앉아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다.  군산 오름 정상에서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 한 켠에 희망이 가득 차오른다는 걸, 마음 한 귀퉁이에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불안감을 내모는 데 이만한 곳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

그런데 웬걸, 군산오름 정상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있으려니 머릿속 현실 회로에 먼저 불이 들어왔다.


현실이 말했다.

여행사? 코로나 시대에 무슨 얼어 죽을 여행사? 세상 일이 다 네 마음대로 될 것 같아?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야, 이런 말이 왜 나왔겠어? 대한민국엔 패자부활전이 없어. 가늘고 길게 가는 게 최선이. 세상에 꿈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 다들 다른 삶을 꿈꾸다가도 가족 보며 버티는 거지.


이상이 답했다.

그래, 니 말도 맞다. 그런데 가야 할 때 가지 않으면 가려할 땐 못 갈 것 같아서, 지금 이대로 끝까지 가면 진짜 내 삶 끝에 닿았을 때 후회하게 될 것 같아서... 


현실과 이상 사이, 끊이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를 돌고 돌던

그때였다. 반딧불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내 주위를 빙빙 돌았다. 반딧불은 두 마리, 세 마리 늘어나더니 이내 수십 마리가 되어 나를 감쌌다. '지금 군산 오름 정상에 얼굴에 근심 걱정 가득한 사람이 있으니 우리가 응원해주자' 반딧불 커뮤니티에 이런 소문이라도 퍼진 걸까? 무질서한 듯 그보다 질서 정연할 수 없는 빛의 궤적, 그 뒤로 무심히 박혀있는 별들의 반짝임. 그건 차라리 아이돌 그룹의 칼군무에 가까웠다. 마치 날 위한 반딧불의 플래카드 응원처럼 느껴다. 이런 엔 감정을 증폭시키기 위해 BGM을 깔아야 한다. 선곡은 Sam smith의 「Fix you」. 눈치 없이 닳아버린 핸드폰 배터리 때문에 듣지는 못했지만, 이미 내 마음은 치유가 끝났다.

결국, 나는 지난 몇 달간 고민해 온 갈등의 마침표를 찍어버리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황홀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하기 위해서라도 여행사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음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인터넷에서 총 4팀을 모집해 '예행연습 투어'라는 이름으로 실제 여행을 떠났다. 실제로 여행사를 운영한다면 나와 참가자들은 어떤 추억을 공유하게 될지, 내가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가늠해보는 여행이었다. 투어 참가비는 공짜였다. 하루 동안 가능한 많은 곳을 다니기 위해 점심식사는 김밥으로 대체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밥을 내 돈 주고 사서 여행 코스의 하이라이트인 세로토닌 폭포에서 나눠 먹기로 했다. 여행 중간에는 전날 미리 세워둔 캠핑카에서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시간도 넣었다.  



지난 5월에 출간한 나의 첫 책은 이렇게 '인터넷에서 사람을 모집해서 예행연습 투어를 떠나보겠습니다'로 다. 책의 원고를 1월까지 출판사에 넘겨야 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 사람들은 뒷이야기를 궁금해했다. 실제로 그렇게 떠난 여행은 어땠는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상에 없던 여행사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을 감정을 선물해주겠다던, 나는 그들의 행복한 표정을 바라보며 세상 행복한 사람이 되겠다던 꿈은 차갑게 식고 말았다. 뜨거운 용암이 바다에 닿으면 차갑게 식어 현무암이 되듯, 뜨겁던 내 꿈은 현실 세찬 파도를 맞자 빠른 속도로 식어버렸고 움직임도 이내 멈춰 검은 돌이 되었다.


까맣게 식어버린 나

파도와 바람은 무죄

뜨거웠던 어제 내가 범인

- 「검은 돌」 by 9와 숫자들


누굴 탓하겠나. 꿈을 실현하지 못하는 게 죄라면, 한때의 치기 어린 마음만으로 뜨거운 꿈을 꾸었던 내가 범인이었다.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삼지 말라는 말, 좋아하는 것도 일이 되면 행복하지 않다는 말,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좋아하지 않는 일도 해야 한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내가 예행연습을 하고서야 깨달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는 4가지였다.  


1. 코로나 때문이겠지만 여행 전날 취소하는 사람이 예상보다 너무 많았다. 여행 첫날은 네 명중 2명이 바로 전날 취소하는 바람에 2명이서 여행을 떠났다. (덕분에 이 둘은 캠핑카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행운을 누렸다)


2. 여행을 떠난 4일 중 하루는 눈보라가 쳤다. 눈발이 귀싸대기를 날리고 갈 때마다 나와 여행객들의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그러고 보니 이런 상상은 해보지도 않았네? 여행하는 날 하루 종일 비바람이 몰아친다면? 아, 상상하기도 싫다.


3. 평소 남 눈치 보는 성격이 아닌데 여행 중간중간 자꾸만 여행 손님들의 눈치를 보게 됐다. 다른 사람의 차를 돈 받고 대신 운전해주는 대리운전기사가 된 기분이랄까. 여행 손님들의 표정이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괜스레 여행 코스가 마음에 안드나, 불안해졌다. 공짜로 점심까지 제공하며 여행을 다녀도 이렇게 눈치를 보고 있는데 돈 받고 여행을 다닌다면? 아, 상상하기도 싫다.


4. 여행도 일상이 되자 금세 지루해졌다. 같은 장소를 지날 때마다 같은 멘트를 반복하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꿈꿨던 여행은 이런 게 아니었다. 나는 여행을 좋아했던 건 갈 때마다 뭔가가 늘 달랐기 때문이었는데, 여행도 일상이 되 지루해다. 이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잃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워졌다.




며칠 후,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친구 몇몇과 같은 코스로 여행을 떠났다. 내가 여행사 예행연습 투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너는 이런 게 있으면 자기든 먼저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냐'며 이번엔 자기들을 위해 시간을 내어달라던 친구들이었다. 그래, 이런 게 진짜 여행이었다. 계획 없이, 시간표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며 자유로이 쏘다니는 여행. 가자!


여기 이런 길도 있었네? 여기 한 번 가볼까? 첫 번째 코스부터 평소 가지 않던 길 가봤다가 새로운 장소를 발견했다. 그날따라 한치물회가 먹고 싶어 근처 식당을 찾았다가 한치물회 맛집을 발견하는 행운도 누렸다. 여행 도중에 갑자기 커피가 땡겨 마지막 코스를 생략하고 찾아간 커피숍은 여행의 대미를 장식했다. 큰 대, 맛 미. 대미. 그래, 이런 게 진짜 여행이.


내 꿈은 그렇게 에스프레소 같은 씁쓸한 뒷맛을 남기며 산산조각 났다. 그러나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깨어진 꿈의 파편 중 유난히 빛나는 한 조각을 주워 햇빛에 비추어보니 다른 꿈이 보였다. 역시,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다음 글은 그 꿈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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