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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Apr 23. 2024

지금은 때가 아니에요.

<Don't go away> - Oasis

저녁 8시, 대천 해수욕장. 스쿠터는 대충 세워두고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날 목포에서 인천까지 400Km, 오늘은 300km를 스쿠터로 달렸으니 지칠 만도 했다. 이젠 좀 쉬자. 핸드폰으로 근처 숙소를 알아보는데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어디니?"

"대천이요. 대천 해수욕장."

"대천? 거기는 왜 갔니?"

"스쿠터 타고 혼자 여행 중이에요. 서해안 일주요."

"아버지 쓰러지셨다. 암이래. 바로 제주대 병원으로 와야겠다."

"네? 내일 새벽 배 타고 바로 갈게요."


다음날 아침에 목포에서 출발하는 배를 검색했다. 아침 7시에 출발하는 배가 있었다. 목포항은 200km 넘게 떨어져 있었다. 거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밤을 새워서라도 스쿠터를 끌고 목포항까지 가야 했다. 하필 핸드폰 배터리가 간당간당했다. 보조배터리도 없었다. 일단 핸드폰은 꺼두고 감에 의지해 목포항을 찾아가기로 했다. 오른쪽에 바다를 끼고 무작정 달렸다. 중간에 어느 섬에 잘못 들어가 바람에 시간이 한참 지체됐다. 당일 이동 거리가 500KM를 넘기고 시간이 새벽 4시를 넘어가자 무아지경의 상태가 됐다. 무의식적으로 스로틀을 땡겼다.


적지를 50km 앞두고 문제가 생겼다. 기름이 거의 다 떨어졌다. 배터리를 아끼려고 꺼두었던  핸드폰을 켰다. 주변에 일찍 오픈한 주유소가 있나 검색해 보니, 없었다. 여기서 포기해야 하나. 일단 기름이 엥꼬날 때까지는 달려보자. 기적처럼 셀프 주유소가 나타났다. 셀프 주유소가  보급되기 시작하시점이었다. 나는 셀프 주유소를 이용해 본 경험이 없었다. 다행히 주유소 안에 주유기 사용 방법이 적혀 있었다. 그대로 따라 했더니 기름이 채워졌다. 결국 목포항에 도착했다. 계기판에 620km가 찍혀있었다. 그날 하루동안 620km를 달린 것이다. 스쿠터로.


병원에 갔더니 아버지께서 응급 처치를 마치고 누워계셨다. 아버지는 평생 운동을 거르지 않으신 분이다. 60이 넘은 나이에도 보디빌딩 선수냐는 질문을 자주 받으셨다. 그런 아버지가 환자복을 입고 작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모습이라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위암 3기여서 위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한때는 나의 영웅이었던 사람, 뭐 하나 빠지는 거 없이 잘난 사람, 그에 비해 별 볼일 없는 나를 열등감에 빠뜨 나의 지옥문을 열어젖힌 사람,  칭찬에 인색했던 사람, 그러나 미워할 수는 없는 사람, 가까이 다가가려 할수록 더 멀어지는 사람, 애증이라는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알려준 사람.


나에게 어른이 된다는 어린 시절 마음속에 세운 아버지의 동상을 조금씩 허물어가는 과정이었다. 그 동상이 다 허물어지기도 전에 아버지는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그때 나는 한창 오아시스에 빠져있었다. 1,2집이 너무 큰 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팬들 기대치에 못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 3집마저도 나는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한 노래는 <Don't go away>였다. 어머니가 암에 걸린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노엘 갤러거가 만든 노래였다.

때로 어떤 노래는 내가 처한 상황과 정확히 맞아떨어져서 날 위한 노래인가 싶을 때가 있다. 이 노래가 그렇다.


(가사)

A cold and frosty morning there's not a lot to say

About the things caught in my mind

차갑고 서리가 내린 아침, 할 말이 그리 많지는 않아요
내 마음에 걸리는 것들에 대해서 말이에요


As the day was dawning my plane flew away

With all the things caught in my mind

날이 밝아오자 비행기는 멀리 날아가 버렸어요

마음속 근심을 싣고서


And I don't wanna be there when you're coming down

And I don't wanna be there when you hit the ground

나는 당신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추락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So don't go away

Say what you say

But say that you'll stay

그러니 가지 말아요

무슨 말이라도 해줘요

내 곁에 있겠다고 말해줘요


Forever and a day

In the time of my life

'Cause I need more time

Yes, I need more time just to make things right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내 삶이 다할 때까지

왜냐면 전 시간이 더 필요하거든요

잘못된 걸 바로잡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거든요

(이하 생략)



버지의 수술 날짜가 잡혔다. 며칠 후 스쿠터를 타고 퇴근하는 길. 신호등에 걸려 신호 대기를 하고 있는데 이어폰에서 <Don't go away>가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때 이미 직감했던 것이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아버지는 위를 잘라냈다. 지금은 잘 살고 계신다. 우리는 여전히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사이다. 생각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요즘엔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더 멀어지지만 않아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래도 가능한 오래 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더 멀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기억들은 희미해질 것이고, 나는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지금 나이에 가까워질 것이고... 그러다 보면 멋모르던 어린 시절처럼 그와 가까워질 날도 오겠지.


그러니 섣불리 가진 마시라. 나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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