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 라이프 마지막 날, 캠핑카 안에 누워 지난 날을 회상했다.1.5평 좁은 공간에서 누구보다 넓게 지냈던 나날들. 밤바다, 별, 새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 세상과 멀찍이 떨어져 자연의 속살 안에서, 자연을 벗 삼아 살았던 순간들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개중 내 마음이 오래 머물렀던 장면이 하나 있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이밴 라이프의 목적이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함이었다면, 그날의 깨달음만으로도 난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확신할 만큼 그날의 울림은 컸고 여운은 짙었다.
캠핑카에서 사는 동안 나는 주로 '속골'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가끔은이렇게 밴 라이프에 최적화된 장소를 너무 일찍 발견한 게 나에겐 독이 됐나 싶기도 하다.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매일 앞마당이 바뀌는 삶을 살지는 못했으니까. 굳이 그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정도로 속골은 환상적인 장소였다.
일단 바다가 보였고, 사람이 별로 없었다. 늘 시냇물 소리가 들렸고, 별이 잘 보였다. 설거지할 물을 구하기가 쉬웠고, 화장실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심지어 와이파이도 잘 터졌다. 여기서 우연히 하루를 보낸 첫날, 나는 밴 라이프에 이보다 더 적합한 장소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됐고, 실제로도 그랬다.
단 하나 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화장실이나 바닷가 곳곳에 버려진 쓰레기들이 그랬다. 사람들이 먹다 버리고 간 플라스틱 일회용 컵과 술병, 온갖 쓰레기들... 심지어 개중에는 다 마시지도 않고 음료수가 가득 든 채 버려진 플라스틱 컵도 많았다. 이런 곳에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사람들은도대체무슨 생각으로이러는 걸까? 쓰레기통이 없는 것도 아닌데... 하긴 평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쓰레기를 버리지도 않았겠지. 이기적인 사람들은 참 세상 살기 편하겠다.
신기하게도 이 쓰레기들은 다음날 어김없이 치워져 있었다. 궁금했다. 이 쓰레기들은 누가 치우는 걸까? 궁금증은 몇 주 후에 풀렸다. 유난히 날씨가 추워 다른 때보다 일찍 일어났던 그 날, 시계를 보니 새벽 5시였다. 다시 자려니 잠은 안 오고 바람도 쐴 겸 밤바다 보며 멍 때릴 요량으로 캠핑카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 인기척이 느껴져 바라보니화장실 근처에 아주머니 한분이 계셨다. 이 시간에 산책을 하시는 걸까? 그러기엔 너무 이른데... 자세히 보니 아주머니 손에 뭔가가 들려 있었다. 마포 걸레 자루였다. 그제야 궁금증이 풀렸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데도 공공 화장실이 깨끗했던 이유, 속골 곳곳에 가득 쌓여있던 쓰레기들이 다음날이면 치워져 있던 이유. 아주머니의 보이지 않는 헌신 덕분이었다. 물론 그 아주머니도 지자체에서 일정 금액을 받고 일을 하시는 분이시겠지만 어느 만큼의 돈을 받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했다. 그래서 굳이 '헌신'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다.
순간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헌신에 빚진 채 살고 있음을.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가남들 자는 시간에 타인이 버린 쓰레기를 치워주고,타인의 화장실 정화조를 비워준다. 우리가 사는 집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며, 이 집도 누군가가 내어준 길 위에 있다. 어디 이뿐인가.내가 쓰는 핸드폰, 인터넷, 옷, 음식 등 어느 것 하나 타인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고보니 내 캠핑카도 누군가가 만든 차를 또 다른 누군가가 집으로 바꿔준 거다.
이미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으니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타인의 노동으로 인해 내가 해야 할 일이 적어지는 혜택'을 보게 된 건 길게 잡아봐야 수백 년도 안됐다. 쉬운 예로, 우리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우리는 내가 싼 대변을 내가 처리하고 우리집 쓰레기는 내 스스로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다. 내 집에 생긴 문제는 죄다 알아서 처리해야 했겠지? (조선시대에는 평균 기대수명이 40살 이내였다고 하니 난 지금쯤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시대에 태어난 것도 참 감사한 일이다)
새삼 모든 게 감사하다. 남들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타인을 위해 희생하시는 누군가가 없었더라면, 집안일도 힘든데 사회생활도 힘든데 무슨 할 일이 이렇게 많냐며, 세상은 온통 투덜이들로 가득 차지 않았을까?
그 후로 나는 속골 근처에 쓰레기가 버려져있으면 직접 주워 쓰레기통에 버리게 됐다. 아파트 쓰레기장에 종이박스가 펼쳐지지 않은 채 버려져있으면 내가 펴서 버리게 됐다. 택배 아저씨를 마주치면 음료수라도 하나 드리게 됐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이런 자그마한 노력들이 샘물처럼 모여 강을 이루면 그 강이 이르는 바다에는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세상이 펼쳐져 있을 거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빚진 수많은 영웅들이 있다.
나는 바란다.
그들의 노동을 당연한 것이 아닌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따뜻한 사람들의 눈빛이 그들에게 닿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