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 달 한번 하는 온라인 독서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독서토론 리더, 심화 과정을 같이 했던 동기들과, 수업때의 ’감’을 잃지 않기 위해 갈고 닦는 시간인 것이다.
사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순전히 ‘친구’라고 부를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의 끈끈한 우정은 독서 수업 시간보다 더 값지고 소중했던 스터디 모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 정말 생각지도 못한 소식을 들었다. 몇 주 전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가볍게 얘기했던 분이, 생각보다 심각한 단계를 지나고 계시다고 밝혔다. 그분은 그 소식을 얼마나 밝게 이야기하시는지,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대하는 것도 실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두 시간 토론을 마무리하고 오후 내내, 지금까지도 나는 먹먹한 기분을 떨쳐내기 힘들다.
아마 그분이 나와 같은 나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람이 태어나서 사고를 당하고 병에 걸리고 하는 게 어떤 이유가 있어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릴 때 마냥 ‘권선징악’ 이론을 맹신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런 불운은 도둑처럼 갑자기, 엉뚱하게 닥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나도 걸릴 수 있던 그런 병이 그 누군가에게 옮겨 간 것처럼 너무 미안하고 안쓰럽고 우울했다.
얼마 전에는 남편 친구가 ‘소뇌위축증’이라는 생소한 병에 걸려 회사도 그만뒀다는 소식을 들었다. 항상 인생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만났을 때는 그 전의 총명함을 찾기 힘들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발병해서인지, 많이 우울해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가 성숙하지 않은 마음으로 병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적당한 위로를 못 해준 것도 같다. 환자 자신보다 더 당황했던 마음을 숨기기 위해 시시콜콜 잡다한 이야기들만 늘어놨으니 말이다.
가까운 친구들의 발병 소식은 나 자신을 무섭게 돌아보게 만든다. 그들이 겪고 있을 어려움과 고통이 그냥 먼 이야기처럼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 가족이 겪고 있을 슬픔을 생각하면 정말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진다.
지금 건강하다는 것. 그것 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운인지.
그 행운이 내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아픈 모든 이들에게 얼마나 미안해지는지.
오늘 아픔을 나눠 준 그분께, 글을 써 보시라고 말씀드렸다. 책에 대한 생각이 워낙 깊은 분이시라 그 마음을 풀어내는 것만으로 좋은 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마침 오늘 우리가 같이 읽은 책도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였다.
조지 오웰은 정치적 목적으로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는 있다.
하지만 나에게 글쓰기란 내 삶의 주인공인 나를 적당하게 미화할 수 있는 수단이다.
그 누구의 반박도 받지 않고, 내가 생각했던 것, 내가 느꼈던 감정을 솔직히 토로할 수 있는 공간이니 말이다.
그러니 오늘 그분이 다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이 전하고 싶은 말, 쓰고 싶던 이야기, 그분의 인생에 대해 술술 풀어주셨으면 싶다.
눈과 귀를 열고 기다리는 열혈 독자가 이미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