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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가언니 Aug 23. 2021

청소기와 결투 중

청소기와 결투중 (좌) 호스 물어뜯기 공격 중 (우)

진공청소기를 돌리려면 2인 1조의 치밀한 작전을 짜야한다. 슈렉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나는 최대한 산책 시간을 길게 뽑아야 하고, 그 사이 엄마는 빠른 속도로 집안의 모든 방에 청소기를 돌리셔야 한다.


청소기는 슈렉이에게 악마이자 결투 상대이다. 특히나 슈렉이가 베이비이던 시절 우리 집에서 쓰던 청소기는 독일제 흡입력이 엄청 좋은 뚱뚱이 청소기였다. 명성에 걸맞게 고장도 나지 않아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하고 있던 것이니 그 소음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3개월 베이비 슈렉의 눈에는 펄럭이는 나의 바지도 대적 상대였던 것이었을까.

사실 슈렉이의 대적 상대는 진공청소기만이 아니어서, 가정용 대걸레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눈앞에서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모든 것이 싫었는지 대걸레에 달려들어 그 걸레 자락을 물고 싸움을 시작했다.


11살 슈렉이는 더 이상 진공청소기와 싸우지 않는다. 나이 덕분에 의젓해진 탓 일수도 있고 큰 덩치의 엄청난 소음을 내던 진공청소기를 핸디형 무선청소기로 바꾸면서 소음이 줄어서일 수도 있다.


강아지는 청각이 매우 발달해있다. 그러니 사람한테도 시끄러운 진공청소기 소리가 개들에게 스트레스일 것은 뻔한 일이다. 심지어 후각은 인간의 그것의 몇 배나 된다고 하니, 청소기에서 나는 먼지 냄새라고 해야 할까 그 냄새가 슈렉이에게는 더 강력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슈렉이에게 청소기는 몹시 시끄럽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그래서 무찔러야 하는 악마인 것이다.


“다 듣고 있다.”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귀 밝은 슈렉이

강아지는 귀가 밝을 뿐 아니라 생각보다 똑똑하기도 하다. 이를테면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로 누가 오는지 구분해낼 수 있다.


“띵띵-띵띵”이라는 한 번 쉬는 간격의 소리는 슈렉이의 할머니(=나의 엄마)가 비밀번호를 누르시는 소리다. 자고 있던 슈렉이는 침대에서 점프해 현관까지 한달음에 달려가 현관 중문에 앞발을 올리고 서서 꼬리를 흔든다. 어떤 때는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짖기도 한다. 나의 엄마는 귀가가 늦으면 슈렉이에게 혼이 난다.


“띵- 띵- 띵- 띵” 느린 비밀번호 소리는 슈렉이 할아버지(=나의 아빠)이다. 할아버지는 무서워하기 때문에,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는다. 개의 본분을 잃지 않기 위해서 침대에서 일어나서 현관 쪽을 바라보고는 서 있는데, 꼬리를 흔들지도 않고 한걸음 더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 그 광경을 처음 본 내가 깔깔대고 웃었더니 “쟤는 원래 나 안 좋아해.”라고 아빠가 말씀하신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식사하실 때마다 허벅지에 달라붙어 있다. 얻어 먹을 것이 있을까 하는 심산이다.

어릴 때 슈렉이는 할아버지를 엄청 좋아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할아버지 방에 놀러 가는 것을 좋아했다. 할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시면 쫓아 들어가서 몇 번이고 그곳을 들락날락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비밀을 알 수 있었으니, 할아버지가 서재에 슈렉이 간식을 숨겨놓고 방에 들어올 때마다 하나씩 주셨던 것이다. 둘만 아는 비밀이 있었던 게다.


그것도 어릴 때 이야기이고, 췌장이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슈렉이에게는 간식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날 이후로 슈렉이는 자기 전에 칫솔질 대용으로 씹던 껌을 비롯해 아무런 간식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자연히 슈렉이가 할아버지의 방에 들어가는 일도 줄었다.


슈렉이랑 할아버지랑 산책하는 모습. 둘은 좋은 산책 친구

그나저나 큰 소리가 나면 무서워서 쉬를 해버리는 강아지들도 있다고 하던데, 우리 슈렉이는 악마 청소기에 대적해서 용감하게 싸우는 걸 보니 사냥견 출신이 맞군. 아주 늠름해~




슈렉이는 월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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