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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가언니 Oct 12. 2021

내 주특기는

a beautiful little fool


“I hope she’ll be a fool—that’s the best thing a girl can be in this world, a beautiful little fool.”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는 갓 태어난 딸이 예쁜 바보로 자라기를 바란다고 했다. 1920년대 여성으로서 그녀가 처한 현실을 냉소적으로 말한 것이겠지만, 나는 맥락과 상관없이 beautiful fool 이라는 단어만 뚝 떼어서 슈렉이가 그렇게 자라기를 바랐다.


강아지를 키우게 되자 주변에서는 여러 가지 훈육법을 알려줬다. 배변패드가 아닌 곳에 쉬를 하면 신문지를 말아서 바닥을 탕탕 치거나 엉덩이를 큰 소리가 나게 때리면 강아지가 무서워서 말을 듣는다기에 그렇게 해봤다. 손바닥만 한 아기 강아지가 잔뜩 겁을 먹고 몸을 납작 엎드리는데, 내가 학대를 하는 악마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 그만 두었다. 오히려 슈렉이의 배변 습관은 칭찬과 간식으로 기를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반려견 라이프 카운슬러인 미우라 겐타는 <그 개가 전하고 싶던 말>에서 "하루 중 80퍼센트 야단맞고 20퍼센트는 칭찬받는 반려견보다, 80퍼센트 칭찬을 받는 반려견들이 주인과 마음이 더 잘 통하게 됩니다. 반려견은 주인이 바라고 칭찬해주는 행동을 더 잘하기 때문입니다. " 라고 설명했다.


집에 오면 자기를 알아봐달라고 다리에 달라붙는 강아지를 모르는 체하고, 잠잠해지면 그 때 돌아봐야 서열 정리를 할 수 있다기에 시도해봤다. 하지만 한번만 봐달라고 엉겨 붙어 있는 강아지를 차마 떨쳐낼 수 없어서, 집에 돌아오면 슈렉이가 만족할 때까지 슈렉이만 쓰다듬는다. 그래서 난 슈렉이보다 서열이 낮다.


쓰다듬다가 멈추면 안 됨


사실 내 서열이 떨어지는 것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는데, 무서운 병원에 데려가기, 겁나는 미용실에 데려가기, 그리고 성가신 목욕은 베이비 때부터 내 담당이다. 싫어하는 모든 것은 다 엄마인 내가 하니까 슈렉이에게 나는 항상 후순위이다.


반려동물 행동심리 전문가인 김윤정은 <당신은 반려견과 대화하고 있나요?>라는 책에서 개에게 말을 걸 때는 명령이 아니라 요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족인 개에게 명령하지 말고 명랑한 목소리로 요청하라는 것이다. 이제껏 본 훈육 지침서와 달리 그녀는 개가 서열 높은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말을 듣는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난 슈렉이보다 서열이 낮아도 괜찮다. (슈렉이가 나를 정서적으로 가깝게 생각하고 있는거 맞겠……지?)


이것은 “손”하면 올리는 슈렉이의 보송보송 앞발.


그래서 우리 슈렉이가 뭘 할 수 있냐 묻는다면, “손”을 할 수 있다고 대답할 수 있다. 다만, 내 주먹 안에 간식이 들어있고, 그 냄새를 맡았을 때만 내 주먹 위에 자기 앞발을 올린다. 그게 다다. 다른 강아지들은 “앉아.” 하면 엉덩이를 내리고, “코” 하면 엄지 검지로 만든 원 사이에 코를 끼워 넣고, 손을 휘저으며 “돌아” 하면 빙그르 한 바퀴 돌던데...... 그런 주특기 따위, 우리 슈렉이에게는 없다.


개는 인간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한 가지 속성이 있다. 그것은 내가 나라는 사실만으로도 가치 있는 존재임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조건 상대에게 수용되는 경험은 내게는 기적과도 같았다. 개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내 직업은 무엇인지, 내가 녀석과 만나기 전 얼마나 실패로 얼룩진 인생이었는지, 하루하루 무슨 일을 하는지를 상관하지 않았다. 녀석은 그냥 나와 함께 있으려 하고, 이것은 내게 비길 데 없는 기쁨이다.

캐롤라인 냅, <개와 나> 중에서


개는 내가 나라는 사실만으로도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니 나도 슈렉이가 강아지라는 사실만으로 사랑한다. 주특기가 있건 없건 간에.


“어차피 10년 밖에 못 사는데,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아라.”


이게 내 생각이었고 그렇게 키웠다. 슈렉이는 10년을 넘어 11년째 살고 있고, 주특기는 하나도 없지만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하루에 네 번씩 산책하면서.


“더 이상은 힘들어서 못 간다” 땅바닥에 철퍼덕 베이비 슈렉이 1살 때


그러고 보니 슈렉이의 주특기는 산책이라 할 수 있겠다. 어려서는 산책을 하다가 힘들면 땅바닥에 철퍼덕 퍼지기 일쑤였다. 그러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일어나지 않아 집까지 안고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1시간, 2시간을 걸어도 못 가겠다고 엉덩이를 대고 앉거나 바닥에 없드려버리는 일 없이 끄떡 없이 잘 걸으니 말이다.


슈렉이의 일상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책을 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11살이요? 어린 아이인줄 알았네. 털이 윤기가 흐르고 관리가 잘 되어 있어서요~”

“노견인데 굉장히 건강해 보이네요.”


같은 것들이다. 프로 산책러 슈렉이, 이걸로 충분하다.


“엄마, 빨리 안 따라오고 뭐해요?”





슈렉이는 월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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