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기억들이 생긴다. 이 기억들 중 특별한 어떤 것들은 마치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세월이 많이 지나도 선명하게 불러올 수 있다. 주로 슬프거나, 기쁘거나, 고통스럽거나, 감격스러운 순간처럼 강렬하고 인상적인 사건들이 이런 기억으로 남는다.
하지만 간혹 특별히 강렬한 사건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처럼 남는 순간들이 있다. 나에게는 느긋하게 넘어간 오후의 태양이 집안을 비출 때의 풍경이 그런 순간들 중 하나다. 밝은 볕이 상대적으로 어두워진 실내를 밟으며 선명한 빛의 자국을 남기는 모습은 항상 마음을 안락하게 만든다. 몽롱하게 빛나는 태양의 흔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머릿속이 멍해지며 근심도, 걱정도, 불안도, 고민도 희미해져 버린다. 어두워진 실내를 가득 채운 빛의 형상이 마치 어둑해진 내 마음속에 밝음이 가득 찬 것 같은 기쁜 착각을 일으킨다.
우두커니 벽에 기대고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사 모든 일이 시시해지면서 잠이 쏟아진다. 피로에 지쳐 쓰러져서 잠들 때의 날카로운 잠의 달콤함이 아니라 구름처럼 푹신하고 갓 구워 낸 빵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졸림이 눈꺼풀을 눌러 닫는다. 그렇게 잠드는 순간은 매번 겪을 때마다 안락한 평화를 느끼게 해준다.
지금껏 많은 이사를 하며 여러 번 집을 옮겼지만 어떤 상황의 어떤 집에서도 이런 오후 햇살의 안락함을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 항상 있었다. 깊은 슬픔이나 절망에 휩싸여 마음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을 때조차도 이런 순간이 어김없이 찾아왔었다. 언제 어디서나 눈을 감으면 어둑어둑한 실내에 따뜻한 빛이 가득 채워지는 순간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마치 사진첩처럼 여러 시간대의 여러 장소들이 연쇄적으로 떠오른다. 여행을 가서 무슨 무슨 폭포나 무슨 무슨 대성당 같은 웅장한 풍경을 목도하는 것도 압도적이고 강렬한 경이감을 느끼게 해주지만, 이렇게 일상 속에 옅게 스며있는 소소한 현상도 그에 못지않게 마음을 풍요롭게 채워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