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는 죄가 없다

by 홍환

어렸을 적 무서운 귀신 이야기를 듣거나 심령과 관련된 공포 영화를 보고 나면 그날밤은 항상 무서워서 잠들지 못했다. 어두운 방 구석에서 금방이라도 귀신이나 괴물이 뛰쳐나와 덮칠 것만 같았다. 눈을 감으면 기괴하고 무서운 유령이 지척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런 공포의 연상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도통 잠들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나이를 먹고 세파에 시달리다 휴식을 위해 공포영화를 보고 돌아온 20대 후반의 어느날. 자려고 누웠을 때 나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귀신 나오는 영화를 보고 왔는데도 불을 끈 방이 무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봤던 영화에 등장했던 귀신이 엄청 무섭게 맹활약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면 그 장면 자체는 무섭긴 했지만 그 공포가 현실에 닿지 않았다. 현실감각의 벽을 넘지 못하고 여전히 가상공간 저 너머 어딘가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가장 최근에 귀신이나 괴물 때문에 현실에서 공포를 느낀적이 언제였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무서웠던 귀신 이야기를 떠올려봐도 이제는 더 이상 무섭지가 않았다.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무서워하는 것이 없는 강력한 어른이 되어버린 건가 싶어서 놀랐다.


하지만 당연히 무서워 하는 것이 없는 어른이 된 것은 아니었다. 공포의 카테고리를 조금만 더 확장해봐도 무서운 것들이 잔뜩 나왔다. 다음 달 월세 납부, 당장 내일해야되는 출근, 부족한 회사 일정, 앞으로도 야근을 계속 반복해야 하는 회사 생활, 월급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통장잔고, 방향을 잃은 자아실현. 그런 것들이 엄청나게 무서웠다. 어렸을 적 귀신 생각에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아무튼 거의 비슷한 수준의 공포를 느껴서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어른의 공포를 덮어 씌우기 위해 그 이후에도 의식적으로 무서운 공포영화를 종종 찾아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무서운 영화를 보아도, 그 어떤 귀신이나 괴물이 현란한 퍼포먼스를 선보여도, 끝내 현실감각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사람에게 빙의한 귀신이 목과 관절이 뒤틀린 채로 열심히 계단을 거꾸로 내려와 주어도 내일 출근에 비하면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쭉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귀신이나 괴물이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은 없다. 물론 귀신이나 괴물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현란한 모습으로 항상 최선을 다해 노력해주고 있다. 입에서 뿜어내는 것의 변화나, 등장할 때 놀래키는 연출만 봐도 그들이 눈부신 발전을 해오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 탓일 것이다. 내가 그들이 넘어오지 못할 만큼 현실감각의 벽을 두텁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귀신이나 괴물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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