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
당신은 잘 ‘버리는’ 사람인가.
정리에 관심이 생기면서 언제부턴가 나는 사람들을 만나면 물건을 잘 버리는 편인지, 아닌지를 물어보게 되었다. 물건을 잘 버린다고 해서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정리와 ’ 물건 버리기’의 상관관계는 생각보다 높다. 그리고 이건 자신의 성향뿐 아니라 함께 사는 가족의 성향도 상당히 중요하다.
결혼 전, 엄마와 여동생은 안타깝게도 잘 못 버리는 사람이었다. 여자만 셋이다 보니 함께 옷과 액세서리 등을 공유했는데, 맘먹고 대청소라도 하는 날이면 매번 작은 다툼이 일어났다. 기껏 안 입는 옷들을 합의 하에 정리해서 문 앞에 내놓으면 갑자기 여동생이
“아, 근데 이건 잠옷으로 입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며 하나씩 다시 끄집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옆에서 또 엄마가 맞장구치며
“이건 이런 스타일 좋아하는 내 친구가 있는데 한번 물어보고 버릴까?”
하며 덩달아 옷을 꺼내곤 했다. 그렇게 옷무더기를 담은 쇼핑백은 도르마무처럼 무한히 집 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잠옷용으로 남은 티셔츠가 200장(그냥 내 느낌은 그렇다)이고, 물어보겠다는 친구에게 옷이 전해지는 꼴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다음 옷 정리 때 또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고, 그 옷은 지박령마냥 우리 집 서랍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몰래 버리기 시작했다.(나도 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대부분 엄마와 동생은 내가 그것을 버린 줄도 몰랐지만 운 나쁘게 가끔 걸릴 때도 있었다. 그럼 그날은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물건 귀한 줄 모르냐는 기나긴 연설과 함께 최근 자신들이 잃어버린 물건들을 줄줄이 대며 혹시 그것들도 함께 해치운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요즘은 ‘버린다’라는 표현 대신 ‘비운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쓰레기통에 처박지 않아도, 중고마켓에 올려 쏠쏠하게 용돈 벌이를 할 수도 있고, 필요한 사람에게 공짜로 나눠줄 수 있기도 하니 확실히 ‘버린다’는 표현보다는 마음이 편해지는 표현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이 물건들을 비우는 것을 아깝다고 생각한다. 기껏 사서 버리거나 다른 사람을 주다니. 내 돈을 갖다 버리는 듯한 죄책감마저 느껴진다고 호소한다. 그리고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
“이거 나중에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지금 당장 안 써도 나중에 꼭 필요한 물건이면 어떡하냐며 그때 또 사면 돈을 이중으로 쓰는 건데 그것을 우리는 돈지랄이라고 부른다고, 갖고 있으면 다 쓸 데가 있다고 말이다.
글쎄, 그러면 나는 그렇게 묻는다.
“이거 최근 2년 안에 쓴 적 있어? “
1년도 아니고 2년으로 묻는 것은 뭐, 그래도 2년에 한 번 쓰는 것도 사용의 범주로 넣어보겠다며 나름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사실은 1년 동안 한 번 정도 썼다면 그 역시 안 쓰는 물건으로 쳐도 무방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2년은커녕 5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사실은 그게 거기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물건들이 많다. 2년 안에 안 썼으면 다음 2년 안에도 안 쓸 가능성이 크고, 많이 양보해서 5년 뒤에 그 물건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때 그 물건은 아마 사용 못할 상태이거나, 훨씬 좋은 제품을 이미 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구석에서 찾은 물건을 손에 들고 버릴지 말지를 물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렇게 대답한다.
버려!
결혼을 하고, 남편 역시 처음엔 잘 비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차마 엄마와 동생에게 하듯 몰래 버리기는 시전 할 수 없었기에, 나름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이 없는 동안 내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물건을 남기고 그것들을 질서 정연하게 정리했다. 버리거나 남을 줘도 된다고 판단된 것들은 큰 상자나 봉투에 담아 빼두었다. 그리고는 남편이 오면 온갖 호들갑을 떨며 정리한 곳을 ‘짜잔’하고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은 물건이 주는, 그리고 그것들이 마구 쌓여 있는 것을 보며 받는 스트레스를 간과한다. 그러다가 질서 정연하게 줄 서 있는 물건들, 숨통이 트이는 여유로운 공간들을 보면 그제야 이 풍경이 편안함과 안정감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편 역시 그랬다. “와, 대단하다. 눈이 다 시원하네. “라고 칭찬을 하며 꺼내기 편하고, 훨씬 여유로워진 공간을 즐겼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나는 보기만 해도 숨이 탁탁 막히는 혼란스러운 ‘나머지 상자’를 보여주며 ”이것들은 일단 빼놨는데 한번 보고 남길 거 있으면 알려줘. “라고 한다.
그럼 확실히 남기는 게 줄어든다. 처음부터 ‘자, 여기서 버릴 것만 골라봐.’ , ‘이건 중고마켓에 올려도 되지 않아?’라고 하면 갖가지 이유를 들어 물건을 못 비우게 하는 사람들도 한 번만 여유롭고 상쾌하기까지 한 정리된 공간을 경험하면 차마 이 기분을 잃고 싶지 않아 자발적으로 물건을 처분한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 애초에 필요하지 않은 물건, 정해진 공간에 들어가지 않는 물건은 사지 않게 된다.
결국 돈을 아끼는 건 잘 비우는 쪽이다.
물론 수많은 비움의 경험을 통해, 각자에겐 쓸모의 유무를 떠나 결코 비울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이 보면 왜 저걸 껴안고 사나 싶은 쓰레기지만 나에겐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 버릴 수 없는 나만의 보물들이 있는 것이다. 나에겐 어린 시절 보물 상자라고 부르던 플라스틱 목걸이와 꽃반지 따위가 들어있는 휴지곽만 한 틴케이스가 그렇고, 남편에겐 어렸을 때 땄던 녹슨 메달들과 군복무 시절에 받은 편지들이 그렇다. 아이가 처음 써준 삐뚤빼뚤한 편지와 분명 어린이집 선생님이 만드셨겠지만, 가슴에 구멍 뚫을 뻔했던 아이의 첫 카네이션 역시 나는 버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것들을 쳐박아 두지 않는다. 우리 가족은 각자의 추억의 물건들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그리울 땐 가끔씩 꺼내 본다. 소중한 물건이니 소중한 대우를 받으며 수납장 한 켠에 고이 모셔둔다. 나는 이것이 잘 버려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결국 잘 버린다는 것은 정말 나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물건들만 내곁에 남긴다는 말과 같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