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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랭 May 16. 2023

 존을 사랑합니다

 나는 존을 사랑한다. 다만 당신이 아는 흔한 이름  'john'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은 내가 사랑하는 'zone'에 관한 이야기이다.

 정리 덕질을 하다보면 책상 서랍 안에 구역을 나누는 것을 지나 집 전체에 구역을 나누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힌다. 즉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그것만을 위해 잘 차려진 공간, ‘존(zone)’을 만들고 싶어지는 것이다. 흔히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방 하나를 PC방처럼 ’게임 존‘으로 만들고 싶은 로망이 있을 것이다. 사양 좋은 컴퓨터와 편안한 사장님 의자, 편의점 매대처럼 진열 되어 있는 과자들, 알록달록 다양한 음료로 채워져 있는 미니 냉장고가 있는 ‘게임 존’을 생각해 보라. 상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는가. 서랍 정리가 그냥 커피라면 ‘존’을 만드는 것은 정리계의 ‘TOP'인 것이다.

 우리 집에도 다양한 존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우리 집에 놀러오면 이 다양한 ‘존’들을 보고 우리 가족의 생활패턴을 매우 빠르게 파악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 집에서 떡하니 자기만의 공간을 꿰차고 있는 물건들은 그 집에서 특히나 예쁨 받는 것들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집의 ‘존’들을 공개하는 것이 조금 낯부끄럽긴 하지만 용기를 내 공개해 보도록 하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언제나 늘 찾는 ‘커피 존’


 수납을 위한 가구를 사들일 때는 언제나 신중한 편인데, 커피는 우리 부부에게 생존과도 연결된(?) 특별한 존재이므로 커피만을 위한 제단을 만들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실랑이 끝에 샀지만 안 샀으면 어쩔뻔 했나 싶은 에스프레소 머신과 각종 커피용품들이 살고 있고, 바로 꺼내 마실 수 있는 머그컵들이 함께 정리되어 있다. 각종 차와 꿀, 인스턴트 커피들도 셋방살이 하고 있으며 겨울이 되면 코코아 가루와 마시멜로가 추가되어 ’코코아 바‘로 변신한다. 아쉽게도 지금은 미국 생활 중이라 전압의 문제로 에스프레소 머신 대신 드립 커피 머신을 사용 중인데 일단 우리에겐 카페인을 섭취하는 행위가  중요하므로 만족하며 쓰고 있다.

수납장 안엔 각종 커피용품과 머그컵, 접시 등을 수납했다.
겨울이면 코코아바로 변신하는 커피 존


 아이가 좋아하는 ‘보드게임 존’


‘존’은 방 하나일 수 도 있지만, 이렇게 카트 하나로도 가능하다. 우리 집에는 다양한 카트가 존재하는데 그 중 아이 친구들이 놀러오거나 주말에 할 일 없을 때 가장 많이 끌려나오는 것이 이 ‘보드게임 카트’이다. 카트의 장점은 끌고 다니면서 언제든 그곳을 ‘존’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보관과 이동이 편하여 아이들도 쉽게 정리 가능하고, 보기에도 깔끔하다. 물론 쉬고 싶을 때 저걸 끌고 오며 미소짓는 아이를 보면 공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카트만 끌고 오면 그곳이 보드게임장이 된다.



 엄마의 정신 건강을 위해 만들어진 ’크래프트 존‘


그림 그리기와 만들기를 사랑하는 아이가 있다면 ‘크래프트 존’을 만들기를 추천한다. 연필이며 색연필, 각종 펜들과 종이, 색종이, 풀, 가위 등등이 방과 거실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복식 호흡으로 아이 이름을 부르게 되는데, 그나마 크래프트 존이 있으면 숨을 한 번 고를 수 있다. 또한 이 구역만큼은 아이가 정리하도록 시킨다. 이렇게 작은 존부터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면 점점 큰 구역으로 정리하는 게 가능해진다. 큰 그림을 그리며 아이의 ‘존’을 정해주자.

책장 한 칸에 만들어 놓은 크래프트 존. 도화지와 색종이, 각종 필기구와 문구류를 수납해 만들기도 정리도 쉽다.



 우리 집 인기 코너 ‘술 존’


 그렇다. 나와 남편은 애주가이다. 주말 저녁 안주 하나 만들어 함께 술 한잔 하는 것이 우리 부부의 큰 낙이다. 미국에서는 서로를 집에 초대하여 저녁을 먹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도 이 ‘술 존’은 큰 역할을 한다. 일단 애주가들은 와인 카트만으로도 ‘너 술 좀 하는구나.’를 알아 보고 마음의 빗장을 연다. 술을 잘 못해도 마실 술 잔을 골라보라고 하면 이 잔 저 잔 들어보며 사람들은 아이처럼 신나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이 몇 호였는지는 잊지만 모두 이 ‘술 존’은 기억한다. 그만큼 하나의 ’존‘은 그 집을 기억하는 큰 특징이 되기도 한다.

파티가 열리면 카트는 술로 가득찬다


  그동안 작고 큰 ‘존’들을 만들면서 이곳들이 주는 재미와 편리함이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 카테고리의 물건들이 한데 모여 있으니 동선 편한 거야 말할 것도 없고, 볼 때마다 뿌듯하고 흐뭇한 게 바로 이 ‘존’들이다. 집 안에 작은 카페, 보드 카페, 술집을 만들어가는 쏠쏠한 재미랄까. 더욱이 코로나 기간에는 밖을 못 나가는 대신 집에서 이런 공간들을 만들며 답답하고 지루했던 시간들을 이겨냈던 것 같다. 한동안 sns에 ‘홈카페‘를 비롯한 ‘홈oo'  해쉬태그가 유행했던 것을 보면 어쩌면 ‘존’에 대한 욕구는 모두에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리를 하면서 늘 느끼지만 ’존‘을 만들다 보면 더더욱 나라는 사람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중요시하는 사람인지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죽을 때까지 ’존‘을 사랑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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