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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Oct 22. 2022

꼬리표 떼기(1)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여직원들은 지금 다 어디 있을까?


영화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이 개봉했을 때, 나는 이 영화가 불편했다. 내가 등장하는 영상을 보는 것처럼 부끄럽고 조마조마해서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나도 한때 이 영화 주인공들처럼 대기업 여직원이었으니까.

영화 속 배경이었던 1990년대와 내가 대기업을 다녔던 2010년대는 언짢게도 많이 닮아있었다.


전문대 졸업 후, 첫 회사를 그만두고 대기업으로 이직했다. 전임자는 여상 출신으로 21살이던 그 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퇴사한다고 했다. 처음엔 대기업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는 모습이 가슴 벅차게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한때 자랑이었던 사원증을 보면 정말 내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진짜에는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은 법인데 대기업에서  같은 전문대졸 사원을 설명하는 데는 많은 수식어가 붙어있었다.


‘III’ ‘여직원


이제껏 사원이 회사에서 제일 낮은 직위인 줄 알았는데 대기업 사회에서는 사원보다 더 낮은 직위가 존재했다. 전문대 졸업생인 나는 아무리 오래 근무해도 대리로 승진할 수 없었다.

당시 사원 III으로 입사한 내가 진급하면 사원 II - 주임 - 전임 - 선임이 된다고 들었다. 분명 II 다음은 I인 거 같은데 사원 I은 4년제 졸업생만의 특권인 걸 알고 실망했다. 내가 가장 높이 갈 수 있는 선임 직위도 사원 I보다 낮은 것은 아닐까 하는 자격지심이 들었다.


업계 특성상인지 그 회사의 특징인지 대졸 남자 직원이 대다수였고, 그 이외의 여자 직원들은 대부분이 고졸/전문대졸이었다. 그래서 ‘4년제 졸이 아닌 직원’=‘여직원’처럼 불리게 됐다. 이 군더더기 많은 직위의 여직원들은 누가 누구를 챙길 수 없을 정도로 어렸고, 당시 어리지 않는 편에 속했던 나도 24~26세였다. 그리고 그 자격지심에 쐐기를 박는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했다.


입사한 다음 해 명함 디자인이 바뀌면서 내 영어 직위도 바뀌어 있었다. staff이었던 내 영어 직위는 assistant staff이 되었다. 4년제를 졸업하고 입사한 사원(staff)과 구분해 둔 것이었다.

assistant staff는 무엇일까? 보조 사원이라는 걸까? 그때 내 업무는 일반사무도 있었지만, 다른 4년 제졸 사원들이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잡무도 많았다. 그중 하나가 커피 내리기였는데, 나는 이 업무가 그렇게 싫었다. 나처럼 커피 메이커를 신경 쓰는 건 각 팀의 고졸/전문대졸 여자 직원들뿐이었다. 나중에 커피 머신이 각층에 들어오면서 더 이상 필요 없을 줄 알았던 이 잡무는 확고한 커피 취향을 가진 직원을 위해 계속됐다.


커피 업무는 마치 꺼트리면 안 되는 아궁이 불씨와 같았다. 업무에 집중해 커피를 신경 쓰지 못했을 때도 다른 직원들은 내가 내린 커피를 마시고 싶어 했다. “OO 씨 커피 떨어졌어요”

커피를 마시러 출근을 한 걸까? 나한테 커피를 시키러 출근한 걸까? 자리에서 일어나 혼자 구시렁거리며 커피를 새로 내렸다. 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업무의 우선순위가 커피 내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낡은 옹벽처럼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캐비닛에 부족한 사무용품을 채워놓고 커피를 내려놓는 내가, 중소기업에는 없는 4년제 staff를 위한 대기업 복지가 아닐까 하는 자조적인 마음이 들었다.


연봉도 반토막, 기대도 반토막, 업무도 반토막인 반의반의 반쪽짜리가 된 느낌이었다. 나의 자존감과 의욕은 바닥을 쳤다. 오른쪽으로 누워 자면 오른쪽 코가 막히면서 눈물이 흘렀고, 돌아누우면 반대쪽 코가 막히면서 눈물이 흘렀다. 양쪽 코가 다 막혀 숨쉬기가 힘들어지면 불 꺼진 방, 이불 위에 멍하니 앉아서 막힌 코가 뚫리기를 기다렸다.

막혔던 코에 들어오는 바람을 확인하고 다시 자리에 누우면 이내 눈물이 흐르면서 코가 막혔다. 마르지 않는 베개 위에서 잠들 방법은 숨을 참는 것이었다.


바쁜 시기라 주말에도 출근했던 주임 언니가 월요일 아침 아직도 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여자 화장실에서 옆 팀 사원 욕을 했다. 주말에 내가 없으니 함께 출근한 사원 I이 주임 언니한테 커피를 내려달라고 했단다. 주임 언니는 “내가 OO 씨 커피 내리려고 주말에 출근한 줄 알아요?”하고 짜증 섞이게 응징했고, 사원 I은 “주임님 일이 커피 내리는 거 아니에요?”라고 되받아쳤다고 했다. 당사자인 주임 언니보다 그 이야기를 듣는 다른 여직원들이 더 펄쩍펄쩍 뛰었다.

나는 진급에 진급을 거듭해도 사원 I과 커피 말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보기 싫다고 건너뛸 수 없는 이 사회 속 튜토리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리 충전해도 다 채워지지 않는 오래된 배터리처럼 나는 전원만 들어온 채 꾸역꾸역 출근했다. 쓸데없이 붙어버린 여직원 꼬리표를 떼고 싶었고, 회사에서 커피 메이커를 신경 쓰지 않은 직원이고 싶었다.

결국 내 전임자처럼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26살에 사직서를 냈다. 편입을 준비해 이번엔 4년제 경영대학을 졸업했다. 노력이 부족해 다 채우지 못했던 가능성을 다시 노력으로 다시 메꾸고 싶었다.


그러면 끝일 줄 알았다. 나를 따라다니던 여직원이라는 수식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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