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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Oct 22. 2022

꼬리표 떼기(2)

배터리는 충전 중


대학 졸업 후 도망치듯 두 번의 퇴사를 경험하고, 2019년 이직 한 회사는 이상하리만치 여자 직원 수가 적었다. 이번엔 대졸이니 직장 내 성비는 특별한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내 전임자는 3개월 만에 퇴사해 얼굴도 보지 못했고, 그 전 전임자는 육아휴직 후, 복귀하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전 전임자에 대한 공식적인 퇴사 사유와 몇몇만 알던 비공식적인 퇴사 사유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나를 여직원으로 뽑은 게 아니라던 이 회사에서 처음으로 ‘대리’ 직위를 얻었지만, 딸려온 잡무는 밀쳐낼 수 없었다. 팀장은 거래처 사람들에게 나를 새로 온 여직원이라 소개하며 커피 심부름을 시켰고, 사수인 부장은 습관적으로 스캔을 요청했다.

‘나는 이제 김 대리지, 더 이상 여직원이 아니다.’ 이 커피 심부름과 스캔은 상사가 대리에게 시키는 걸까? 여직원에게 시키는 걸까? 2012년 대기업을 그만두면 떨쳐낼 줄 알았던 궁금증은 어쩐지 풀리지 않았다.


왜 나는 이 이상한 꼬리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이제 남들만큼 공부했고, 전에 없던 직급도 생겼는데 왜 부족한 탕비실 물건을 신경 써야 하고, 매주 커피머신을 청소해야 하는 걸까? 대리라는 방패로는 여직원이라는 수식어를 막을 수 없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은 끝이 없었다.


2020년, 입사한 다음 해 나는 본부장과 연봉협상을 했다. 내가 예상한 금액에 한참 못 미치는 연봉을 제안받았다. 나는 그동안 했던 업무와 앞으로 확장할 업무에 관해 설명하며 더 많은 인상을 요구했다.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잡플래닛을 보면서 내 연봉이 다른 남자 직원과 많이 차이 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연봉협상이 진행되는 그 한 시간 동안 귀에 피가 나게 들었던 공격은 “그럴 자리가 아니다”였다. 본부장은 상고 출신을 이 자리에 채용할지 나 같은 4년제 출신을 채용할지 고민했다면서, 그 자리에 있던 대졸과 그 자리에는 없는 고졸 모두를 죽였다.

자리가 문제인 걸까? 내가 문제인 걸까? 고졸은 어딘가 부족하고 4년 제졸은 어딘가 넘치는 그런 이상한 자리는 왜 만든 걸까? 돌고 돌아 결국 같은 자리라는 생각에 다 부질없다 느꼈다.


내 역량이 의심받는 건지, 이 자리의 한계가 주목받는 건지,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내가 전 전임자처럼 결혼해 육아휴직을 쓴다면, 비공식적인 퇴직 사유처럼 퇴사를 권고받겠구나 싶었다. 여직원을 뽑는 게 아니라던 그 면접 질문 “실례지만 결혼은 했어요?”의 대답이 “네”였다면 이 1/2짜리 대졸 채용은 가능했을까? 내 미혼 사실이 그들에게 실례가 되지 않아 합격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나 싶었다.


그 해 사수였던 부장님이 퇴사하고, 우리 팀에 나보다 연차가 낮은 남자 직원이 채용됐다. 스캔을 시켰던 부장님이 있을 때보다 없어지니 마음이 더 불편했다. 이제 이 언짢음이 직급 때문인지 여직원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있겠다 싶었다.

우리 팀 막내가 들어와도 내 잡일은 물려줄 수 없을 것 같은 기우. 나보다 연차는 낮지만, 더 높은 연봉을 받을 거라는 기우. 남들처럼 대학 나오면 그럴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첫 출근날 말없이 잠수 탄 직원 덕분에 내 기우는 정말 맥없이 기우로 끝나버렸다.


2021년, 월급과 함께 내게 위경련과 과호흡을 던져준 회사와 작별했다. 곧바로 스타트업으로 이직하면서, 버리고 싶었던 내 수식어는 말끔히 떨어져 나갔다. 짙고 오래된 얼룩이라 계속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감개무량했다. 어디 있었는지 손으로 더듬어봐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제 채워지지 않던 배터리 칸까지 초록 불이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회사에서 군더더기 없고, 단순하게 내 소개를 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OO 업무를 담당하는 OOO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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