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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Oct 22. 2022

내가 전단지를 받는 이유

나의 출퇴근 메이트


출근길, 아침 일찍 고용주를 만나러 가는 이 시간은 마음이 무겁다. 내 마음과 달리 야무진 발은 벌써 신발을 챙겨 신고 회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의심과 고민 없는 두 발 덕분에 나는 근근이 출근할 수 있었다.


출퇴근 길,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얼굴을 몇 번 봐서 구면이지만, 차마 인사를 나눌 수 없는 나의 출퇴근 메이트들. 비슷한 장소에서 그들을 만날 때면 오늘도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음에 안심하곤 했다. 그리고 또 다른 구면들, 같은 장소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이다.


나는 좀처럼 전단지를 받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헬스장에 다닐 생각 없는 내가 전단지를 받는 것은 여러모로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2009년 추운 겨울, 회사 언니의 무심한 조언으로 내 생각과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회사로 돌아가면서 전단지 나눠주는 아주머니를 마주쳤다. 옆에 언니는 자연스럽게 전단지를 받았고, 나는 평소대로 받지 않았다. 조금 걸어왔을 때, 언니가 내게 말했다 “OO 씨 전단지 좀 받아주세요. 그래야 추운데 아주머니도 퇴근하지요” 언니 말을 듣고 좀 뜨끔했다. 내가 헬스장에 다니든, 다니지 않든 그것은 아주머니 퇴근에 중요하지 않음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날 이후에도 여전히 헬스장에 관심은 없지만, 언니 말처럼 아주머니의 퇴근을 위해 적극적으로 전단지를 받아 들었다.


정해진 시간을 채워야 회사를 떠날 수 있는 노동자가 정해진 전단지를 다 나눠줘야 퇴근할 수 있는 다른 노동자에게 보탬이 되고 싶어서였다.


[2019년 6월]


10년이 지나 헬스장도 많고, 필라테스도 많고, 전단지도 많아졌다. 그러는 동안 나의 출근도 띄엄띄엄 계속되었다.

점심 먹고 회사로 들어가는 길, 그 시간대 가끔 마주치는 전단지 아주머니가 계셨다. 그날도 습관처럼 일찍 퇴근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전단지를 받으러 손을 내밀었다. 아주머니는 내게 쑥스러운 듯 먼저 말을 걸었다. “매번 미안해요 계속 줘서” 나를 기억하는 아주머니 말에 많이 놀랐다. 전단지 나눠주기에 바빠서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를 거라 생각했다. 누가 받던 상관없을 거라 여겼는데, 지나치는 한 명 한 명을 관심 있게 보기도 하셨구나.


아주머니의 지루한 근무 시간에 이따금 마주치는 나는 ‘아는 사람’이었다.

가끔 마주치는 나를 보면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을까? 구면이지만 알은척할 수 없었던 우리 사이가 아주머니의 말로 잠깐이나마 가까워졌다.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아는 사이. 전단지를 다시 받아 들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건네는 표정, 행동 하나하나가 어쩌면 나를 아는 사람에게 향하고 있었다. 내 호의가 습관이든 가식이든 누군 가의 조언 덕분이든 간에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었다.


[2021년 5월]


이른 아침에도 지하철 출구 앞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새로 오픈한 도시락 가게, 일러스트 학원, 주 5일 근무-월 250을 보장하는 전단지까지.

이리이리 전단지를 받아서 걸어 나가면, 환경미화원 아저씨의 빗질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날은 빗질 대신 전단지 아저씨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거 자꾸 나눠주지 말라고” 여기저기 버려진 전단지를 보고 소리 지르는 환경미화원 아저씨, “이게 내 직업이라고” 절규하듯 반박하는 전단지 아저씨의 구면이 씁쓸했다.


호의로 받아 든 전단지가 얼마 지나지 않아 길바닥 쓰레기가 되면서 갈등이 생긴 듯했다. 나눠준 사람에게서 몇 걸음 떨어지면 전단지를 받던 호의도 초면이 되는 것인가? 전단지를 나눠주는 일도 직업이고, 버려진 전단지를 줍는 일도 직업인데 두 밥벌이가 맞붙으니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그렇지 않았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을 그 싸움의 끝은 못 본 체 뒤로하고 회사로 향하는 길, 두 다리가 무겁고 마음은 숙연해졌다.


여전히 나는 습관처럼 ‘아는 사람’의 퇴근을 재촉하기 위해 전단지를 받아 든다. 그리고 ‘나를 알지도 모르는 사람’이 그 전단지를 보지 못하게 가방 깊숙이 집어넣는다.


같은 시간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내 동지들이여… 어쩐지 당신들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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