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와 만나는 일은 즐거웠다. 나는 무엇이든 쓰고 싶었다. 써야만 내 삶을 기억할 수 있기라도 하듯 나는 쓰기를 원했다. 하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몰랐다. 마흔을 바라보고 있던 어느 날, 학창 시절에 쓴 일기장을 읽었다. 나는 그때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고 지금도 여전히 쓰는 사람이 되길 원하고 있다. 20년이 지나도록 쓰고자 하는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는데 왜 나는 아직도 제자리에 머물러 '마음'만 먹고 있는가? 내가 한심했다.
마음은 원이로되 몸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손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살아온 내 생활들이 눈 앞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몸이 팔팔하고 기회가 되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던 젊은 날엔 앞 날을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흔을 바라보던 그 시절 나는 많이 초조했다. 더 이상 앞을 보지 못하면 어떡하지 두려워하던, 자가면역질환인 '베체트' 환자로 등록된 시절이었다. 내가 과하게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넘치는 정보는 나를 자꾸 넘어지게 했다.
*베체트 병 : 희귀한 면역 매개성 소혈관 전신 혈관염의 하나로, 점막층 궤양 및 안구 문제와 함께 종종 발생한다. 병인은 잘 정의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로 혈관의 자가염증(auto-inflammation)이 특징이다. (출처 : 위키백과)
앞날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며 살기에는 살아갈 날이 길었다. 대한민국은 몇 년 뒤면 초고령사회가 될 테고 나 역시 초고령 인구에 속한 사람이 될 터였다. 불안해하기만 하며 살기에는 지난 세월이 아쉬웠고, 희귀난치성질환자로 살아갈 앞으로의 세월이 억울했다. 나는 이 혼란의 시절을 살아내야만 했다. 나를 버티게 해 줄 힘이 필요했고, 과한 정보를 받아들여 괴로워하는 나 자신을 걸러 줄 필터가 필요했다.
오래전부터 내가 하고 싶어 했던 '쓰기'라는 것을 하며 시간을 축적해보기로 했다. 무엇이든 쓰다 보면 내 생각과 생활이 축적될 것이고, 그 축적된 시간을 연료 삼아 불안한 현재와 미래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블로그에 하나 둘,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엇을 써야 할지도 몰랐고 블로그라는 공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쓰다 말다 제 멋대로였다.
하지만 나는 계속 블로그를 붙잡았다. 쓸거리를 못 찾아 책을 읽고 내 생각들을 정리해서 글로 올렸다. 한 권 두권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책을 읽기만 할 때는 몰랐는데, 쓰다 보니 내가 그 책 속에 들어가 있었고 그 속에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책 읽기가 더욱 재미있어졌다. 쓰는 것은 읽기보다 힘들었지만 나는 쓰기의 과정을 통해 해방감을 맛봤다. 불투명하고 어둡기만 한 미래도 쓰는 순간만큼은 투명하고 밝아졌다. 왜 이제야, 그때부터 썼더라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과 같은 말들은 아무 소용없는 말이다. 새로운 삶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블로그에 쓰지 못할 말들은 실물 노트에 기록했다. 코로나 19로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2020년 상반기, 내 일기장은 무서운 속도로 뒤로 넘어갔다. 채워지는 일기장을 보며 나는 행복했다. 그래, 나는 이 곳에 나를 채워가고 있는 거야, 하면서. 블로그에 올린 글들은 어느 정도는 남이 봐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쓰지만 일기장에 쓰는 글들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것이다. 터무니없는 계획들, 온갖 감정들,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 논쟁의 소지가 다분한 의견들, 기타 등등. 이것들은 마음에만 담고 있을 때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글씨가 되어 나타났다고 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되어 갈 수 있었다.
일기장으로 사용할 노트를 고르는 일은 행복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노트를 채울 펜을 사는 일은 즐거웠다. 노트에 무언가를 쓰기 위해 문구를 구입하는 일이 나를 이토록 즐겁게 할 줄은 몰랐다. 그 일은 내 삶에 꽃이 피어나는 일과 같았다. 색색의 펜들, 다양한 소리를 내는 필기구들이 노트 위를 지나가면 글씨는 꽃이 됐다. 노트 위에 쏟아낸 말들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내 삶을 꽃피우게 했다. 나만 아는 나만의 꽃. 세상에 단 하나뿐인 꽃.
이렇게 계속 쓰다 보면 나는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은 내가 될지도 모른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내가 처음으로 썼던 글은 (아주 쉬운) 몇 글자짜리 영어 그림책을 읽고 썼던 글이다. 이렇게 시작한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서 나는, 내게, 쓰기에게, 책에게, 감사하다. 조금씩 쌓아 가다 보면 좀 더 튼튼하고 멋진 산을 볼 수 있으리라. 아름답게 피고 지는 나만의 꽃들을 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