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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용산구 이태원동

누적: 66.78km, 오늘: 20.2km, 걸음 수: 24,635

by 마포걷달

표지사진 | 서울 용산구 이태원1동 ‘안녕? 이태원!’



이태원은 잘 지내고 있을까?


순수하게 궁금함이 앞섰다. 마포 집에서 가까운 ‘이태원’이었지만, 그곳을 자주 갈 일은 없었다.


지난 22년 10월, 핼러윈데이 참사가 있은지 7개월 만에 이태원을 다녀온 적이 있다. 유족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사태 현장을 바라보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다만, 그때의 이태원이 예전처럼 활달한 녀석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1년이 지났다.


건강은 좋아졌을까? 밥은 잘 먹고 있겠지?


이태원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것은 마치 오랜만에 찾아가는 친구의 병문안 같았다. 마음이 있어도 주춤해질 때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뜸 들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물쭈물, 갈팡질팡 할 때는 ‘벌떡정신’이 중요하다. 간편한 러닝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저녁 9시가 조금 넘었고, 아직은 초가을이라 밤공기가 후텁지근했다. 이놈의 더운 바람이 온몸을 에워쌓다.

‘아이고~ 올해 너무 더웠으니 고만 좀 더우면 안 될까?’


추석을 앞두고, 어디에도 갈 일이 없던 나는 ‘한적한 이태원의 산책’을 상상했었는지 모르겠다. 기약 없이 갔다가 전봇대 뒤에서 조용히 안부만 전하고 올 심산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본격적인 걷기를 시작한 곳이 이태원이다. 처음에는 어디를 걷는다는 생각은 못했다. 더욱이 목적지도 없었다. 발길 닿는 데로 움직였고, 거기에 그가 있었다. 참사 이후, 두려운 마음으로 걸어가 무거운 마음으로 마주했다. 여전히 그는 울고 있었다.


아직도 그 골목 입구에 붙어 있던 수많은 포스트잇 쪽지들이 기억난다. 가족과 친구들을 애도하던 글들은 차마 읽을 수 없는 문자였고, 나는 스스로 맹인이 되었다.


그때의 길은 너무 적막해서, 내 생애 가장 외로운 이태원을 보는 듯했다. 그래도 살려고 바둥대는 그에게, 나는 재활을 기원했었다.


오늘,

그때 이후로 딱 1년 3개월 만의 방문이다.




추석 귀성길은 이미 풀린 듯 보였다. 강변북로에도 차들이 많지는 않았다. 마포대교 북단 ‘호텔나루’ 앞 인도를 통해 원효로 2동으로 넘어갔다. 온 길이 어둑어둑해서인지, 아니면 동네 주민들이 전부 고향에 내려간 건지… 개미 소리 하나 없이 혼자 걷는 길이 으스스했다. 그때 갑자기 저 앞 골목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툭~ 튀어나왔다.


어이쿠~ 놀래라!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평소보다 더 큰 소리를 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편이다. 강한 척은 딸아이 앞에서나 할 일이고, 지금은 세상 겁쟁이가 따로 없다. 녀석이 눈을 부라리며 웅크리고 있길래, 나는 슬그머니 눈을 피해 컴컴한 골목을 빠져나왔다. ‘낮이었으면, 너는 나한테 혼났어!’


원효로 2동과 1동을 지나 ‘경의선 숲길’ 끝 부분에 다다랐다. 삼각지로 가려면 경의선 숲길 끝에서 이어지는 ‘삼각지고가차도’를 넘어야 한다. 그 길 옆에는 아주 오래된 기업 ‘오리온’이 있다. 한때는 이 구역 전체가 초코파이 냄새로 진동을 했었지만, 지금은 본사 건물만 남았다.


예전에 누군가 그랬다. 오후 다섯 시에 오리온 본사 정문에 가면, 만들고 남은 초코파이를 나누어준다나 뭐라나? 설령 그럴 일이 없더라도, 그것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한때, 안성에 가면 오후 다섯 시에 안성탕면 공장에서 노숙자들을 위해 라면을 끓여준다는 낭설을 진짜로 믿었으니까 말이다. 그것과 비슷한 거지.


시간을 보니 저녁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왠지 아쉬웠다. ‘조금 일찍, 오후 다섯 시쯤에만 지나왔더라면…’



삼각지 교차로를 지나 용산 전쟁기념관, 그리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이태원으로 가기 위해 ‘전쟁기념관’ 앞을 지나는데, 사복 경찰이 나를 붙잡았다.


실례합니다!
혹시 문화제 참석 때문에 여길 지나시나요?


무슨 소리야… 이 시간에 문화제라니? 아무래도 내가 무슨 집회 참여자인 줄 알았나 보다. ‘아니, 러닝복을 입고서 집회를 하나?’ 행색이 전혀 아닌데도 다짜고짜 검문을 하는 통에 기분이 언짢았다.


문화제요? 무슨 문화제요?
저 지금 운동 중입니다.


내 옷을 가리키며 말하니 경찰이 주춤하면서 길을 터 준다. 대통령 관저를 용산으로 옮기더니 이 지역은 별별 풍경이 되었다. 시시각각 사복 경찰들이 감시를 한다. 세상 편했던 길이 난처한 통로가 되었다.


삼각지부터 녹사평역까지, 1.2km의 보도블록이 어두컴컴하다. 왼쪽으로 미 8군 부대는 자취만 남은 채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다. 나는 한때 용산경찰서 소속으로 군 생활을 한 적이 있었는데, 미 8군 부대의 대테러를 방지한다고 철문 앞에서 경비를 서곤 했었다.


미 8군 부대는 한국 내 미국 영토로, 일반인이 함부로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보초 서는 중간중간 화장실에 간다고 어렵사리 들어갔었는데, 이곳은 그냥 미국 자체였다. 당연히 한국돈은 쓸 수가 없었고, 어디서 달러를 구해와 자판기에서 오리지널 콜라를 사 먹고는 했었다. 겉에 ‘클래식’이라고 쓰여 있던 그 콜라는, 한국에서 판매한 일반 콜라에 비해 맛도 향도 더 달착지근하고 끈적거렸다.


미 8군 부대에서만 움직이는 대중교통 버스도 있었고, 미국 대학교가 두 개 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메릴랜드 대학교였던가? 몇몇의 한국 학생들이 가방 메고 들어가는 걸 보면서, ‘와~ 재네들은 엄청 부잣집 애들일 거야’ 하며 부러워하곤 했었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서도 겨울이면 어찌나 춥고 서럽던지… 내게는 서울이, 서울이 아닌 시절이 있었다.




삼각지에서 녹사평역까지, 감시를 당할까 봐 거리 사진도 못 찍고 이태원으로 넘어갔다. 이태원 입구부터 많은 외국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웬걸? 내가 상상했던 모습이 아니다. ‘뭐야, 이 사람들이 고향도 안 내려가고 전부 이태원에 모였나?’ 싶을 정도로, 입구부터 시끄러웠다. ‘한적한 이태원의 산책’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태원로 큰길이 아닌, 뒷길로 해서 걸었다. 장난이 아니다. 불과 1년 전, 쓸쓸했던 이태원은 사라졌다. 북적여도 너무 북적였다. 외국인들은 그렇다 치고, 한국 젊은이들도 너무 많았다.


음악은 붐붐붐 터지고, 땅이 울린다. 어느 술집, 디제이를 앞에 두고 일렬로 선 사람들이 앞사람의 뒤통수를 보며 웨이브를 추는데, 참 기이했다.


땀에 절은 러닝복을 입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나이를 모두 더한 것보다도 더 많아 보이는 중년 남자 하나가 걷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그도 슬쩍 웨이브를 탔다. ‘미쳤군.’ 피식 웃었다.



이태원 입구에서 ‘이태원힐’ 골목으로 걸어 올라갔다. 몇몇 외국인들이 저마다 맥주병을 하나씩 들고 사진을 찍는다. 내 걱정과는 달리, 그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내가 웨이브를 추든, 땀에 젖은 러닝복을 입었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오늘의 이태원을, 예전처럼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이 골목 저 골목마다 음악 소리가 잔뜩이다. 추석이라고 고향을 내려가는 일은 남의 집 이야기다. 이곳은 오랜 기간 이어질 휴일의 전야제로 가득하다.


유명한 돼지고깃집 ‘이태원정든님’을 지나, 그루브 하게 춤과 음악이 어우러진 ‘더스크틸던’ 앞을 지났다. 그들은 춤으로, 나는 걸어서 땀으로 가득이다. 그들과 내가 다를 바 없이, 이태원의 웰컴은 뜻밖의 희열을 주었다.


문제의 해밀턴 호텔 뒷길까지 걸어갔다. 참사가 일어났던 그 골목에도 사람들이 많다. 그때의 일이 순간 오버랩되었다. 오늘도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걷기에도 벅찰 정도로 그때의 상상이 순간 몸을 죈다.


많은 이들이 음식과 술, 음악과 춤으로 이태원을 예전으로 돌려놓았다. 나는 나의 땀이 그들에게 닿지 않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걸었다. 이태원의 화려한 복장과 치렁치렁한 장신구들, 그리고 몸 구석구석 타투가 가득한 골목에서 나는 진짜 이방인이다. 전봇대에 숨어서 안부를 전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저쪽에서 엉덩이 춤을 추는 여자 셋이 나를 보고 힐끔거린다. 얼른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도 좀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런 장면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 다. 추석이라고 서울이 썰렁할 줄 알았는데, 큰 오산이었다. 가까스로 골목 끝에 다다르니 그제야 숨이 터진다.


방금 지나왔던 이태원로 27가 길, 일명 이태원 뒷길은 ‘이태원 세계음식 문화거리’를 표방하고 있다.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과 음악, 술, 춤들이 어우러져 있다. 반면에 이태원 큰길 하나 사이로 문화가 갈라진다.


이제 길 건너 보광동으로 간다.




이태원의 랜드마크, ‘이태원 소방서’가 위치해 있는 보광동으로 건너왔다. 이곳엔 이슬람교의 중앙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또 다른 신세계이다. 여기저기 아랍권 사람들, 그리고 몸짱 남자들이 많이 보인다. 보아하니 골목마다 ‘트랜스젠더 바’들이 가득했다. 처음 본다.


저 앞으로 서로 손 잡은 ‘연인’ 둘이 걸어간다. 자세히 보니 남자들이다. ‘헉!‘

나는 최대한 표정 변화 없이 지나쳤다. 누구 하나 거추장스러울 것도 없지만, 가장 빠른 걸음으로 ‘남자의 길’을 빠져나왔다. 그 이후에, 보광동 사잇길로 땀에 절은 다람쥐 한 마리가 쏜살같이 뛰어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보광동을 빠져나와 동빙고동으로 걸었다. 동빙고동에는 대사관저들이 많은 편인데, 나는 여기서도 군 복무를 했었다. 밤 중이라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지만, 그 시절 한가닥의 추억들이 길가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듬어 언덕을 타고, 다시 한남동으로 향했다.




한남동, 한남역 근처에는 낡은 주택들이 많다. 대부분 철거를 기다리고 있다. 한남 신도시가 건설된다고, 부동산마다 매매 포스터가 가득하다. 여기 재건축이 시작되면, 또 그의 가치는 어마어마하게 커질 것 같다. 서울에는 다 쓰러져가는 집마저 부러움이다.


비어있는 주택들 어느 한쪽에서 오래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소리가 고양이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니면 누군가 무단침입하여 살살거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오갈 데 없는 귀신이 남아 있던가.


벽에서 벽으로 붙여진 ‘출입금지’ 테이프를 살짝 걷어내고, 컴컴한 골목과 주택으로 한 발짝 들어섰다. 호기심이 앞섰다. 깨진 유리창 너머,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듯했다. 검은 봉지 하나가 흙에 눌리어, 바람이 일 때마다 푸다닥 거린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져 더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순간의 싸늘함이 결코 달갑지 않았다.



한남동에서 순천향대학교 병원을 지나 이태원 부촌으로 다시 넘어왔다. 낮에도 조용한 이태원 부촌은, 저녁에는 적막함 그 자체다. 저 아래 이태원밤의 열기가 여기까지 올라오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어두컴컴한 ‘리움미술관’을 지나 조금은 경사가 높은 아스팔트길을 타고 더 어둑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경사진 계단마다 한기가 서린다. 후텁지근한 공기와 만나 내 발걸음을 더 빠르게 만들기도 했다. 어둠이 만들어내는 괜한 생각들이 발끝에서 올라오길래, 이어폰 음악의 볼륨을 높였다.


검은 실루엣이 화려한 하얏트 호텔이 보인다. 꿈같은 이태원을 지나 세상 조용한 남산에 서 있다. 한참을 올려보다, 뒤 돌아 또 낮은 이태원의 밤을 내려다보았다.


건강해 보이네! 밥도 잘 먹고 있는 것 같고.


이제야 안부를 전한다. 이태원, 너의 상처가 다 아물었는지는 차마 물어보진 못했지만, 좋아 보였다. 그저 잊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괜찮아 보였다. 그래, 그렇게 시간이 약이 되었길 바랐을 뿐야.


오늘, 오길 잘했다. 보길 잘했다.



- 제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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