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 글자는 필기체로 배워요.
큰아이가 CP(초등 1학년)가 된 후 날마다 숙제가 있다. 숙제 중에 매일 해야 하는 것은 쓰기 연습이다. 학교에서 배운 파닉스 진도에 맞게 숙제를 내주면 집에서 쓰기 연습을 한다. 그리고 한 번씩 학교에서 받아쓰기 시험을 본다.
문제는 글자를 모두 필기체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에게 필기체는 그저 영문 캘리그래피에나 필요한 글자였다. 예뻐 보이긴 했지만 배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가져온 노트에는 필기체가 가득했다.
순간 너무나 당황을 했다. 아이 숙제를 도와줘야 하는데, 전혀 도와줄 수가 없었다. 난 인터넷으로 필기체를 검색한 후 글자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렸다. 그리고 아이에게 따라 쓰게 했다.
왜 필기체로 써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글 쓰기도 힘들어하는 아이에게 필기체 알파벳을 쓰라고 하니, 아이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어느새 아이는 나보다 필기체를 더 잘 쓰게 되었다. 이제는 영어도 필기체로 쓰고 있다.
그냥 생각하기에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필기체를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 단지 예쁘게 글을 쓰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그 이유가 너무 개인적인 느낌이다. 인도 프랑스학교에서만 필기체를 쓰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프랑스학교에서 필기체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난 아이의 숙제를 도와주기 위해 필기체 쓰는 연습을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서 필기체 대문자와 소문자를 연습했다. 그리고 지금은 꽤 잘 쓰게 되었다. 알파벨 필기체를 쓸 수 있게 되자, 그림을 그린 후 짧은 영문 글자를 예쁜 필기체로 쓸 수도 있게 되었다.
필기체를 쓰다 보니 글자와 프렌치 언어, 그리고 프랑스 사람들이 왠지 닮아 보인다.
우아한 라인과 곡선, 끝난 것 같으면서도 다시 이어지는 선, 그림 같으면서도 의사가 전달되는, 무엇보다 소문자로 쓸 때 매우 작은 글씨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약해 보이지 않는 모습까지.......
프렌치를 들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소리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느낌이다. 끊어진 듯 하지만 이어진다.
그들의 R 발음은 'ㄹ'이 아니다. '에흐'라고 읽는데 문장에서 들으면 '흐'로 들린다.
'감사합니다'의 프랑스 말은'merci'인데, 발음하면 '메흐 시'라고 들린다. 이 때문인지 프렌치를 듣고 있다 보면 꽤 우아하게 들린다.
프랑스 사람들은 어떨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은 매우 조용조용하고 우아하게 말했다. 행동도 조심스럽고 시끄럽게 떠들지 않는다.
우리 학교에서 마이너리티(minority)인 동양인 학부모들은 모였다 하면 말하느라 바쁘다. 오랜만에 만나면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고, 손을 잡고, 시끄럽게 근황을 말한다. 그게 반가움의 표현이고, 즐거움의 표현이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친구를 만나면 "봉주르"하면서 서로 비쥬 비쥬(프랑스식 인사로 서로 볼 뽀뽀를 하는 것)를 한다. 처음엔 이런 인사에 익숙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나도 오랜만에 만난 프랑스 친구와는 비쥬 비쥬를 하고 있다.
내가 본 프랑스 사람들은 예의 바르다. 하지만 쉽게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학교를 오가며 매일 만나지만 인사를 한 번도 안 한 사람도 있고, 아이의 같은 반 학부모이지만 절대 아는 척 안 하는 사람도 있다. 처음엔 '날 무시하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프랑스 사람들의 특징인 것 같아 이제 나도 같이 무시를 한다. 한마디로 쉽게 친해지기 힘들다.(아이들은 다르다. 아이들은 그냥 친구일 뿐이다.)
둘째 아이의 같은 반 로흐의 엄마, 산드라와 친해지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그것도 로흐의 생일파티에 가서 함께 논 다음에야 서로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이 정도면 꽤 친해진 것이다.) 인사만 하는 사이였다가 최근에 아이들을 데리고 실내놀이터에 함께 가기로 했는데, 큰아이가 가기 싫다고 하는 바람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산드라는 흔쾌히,
"소은이만 괜찮다면 내가 데려갔다가 집에 데려다줄게"
라고 말해주었고, 소은이는 친구들과 함께 실내놀이터에 가서 실컷 놀고 돌아왔다. 산드라는 성격이 내성적인 사람인데, 큰 용기를 내주어 무척 고마웠다.
이들 중에서도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다. 해외생활을 오래 해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동양인 서양인 따지지 않고 쉽게 친구가 된다.
알렉의 엄마, 오렐리는 성격이 매우 강해 보이는 프랑스 사람이다. 머리는 투 블록으로 짧게 잘랐고, 항상 청바지에 셔츠를 입고, 스니커즈를 신고 다닌다. 약간 보이시해 보이는 그녀의 외모는 조금 무서워 보이기도 했다. (키도 엄청나게 크다.) 역시나 알렉의 생일파티에 갔다가 처음으로 그녀와 길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의외로 그녀는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동양 음식에 관심이 많았다. 얼마 전에는 중국 친구에게서 만두(딤섬) 만드는 법을 배웠다며 나에게 한국 음식을 가르쳐 달라고 말했다. 그녀의 남편은 김치와 김밥, 불고기를 너무나 좋아한다며 한국 음식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외모만 보이시할 뿐, 성격은 천상여자였다.
특히 흑인 친구들은 정말 친절하다. 내가 만나본 프랑스 흑인 친구들은 먼저 말을 걸어주고, 친구가 되어준다. 인도 프랑스 학교에서 흑인 엄마는 나뚤이 유일하다. 학교의 모든 동양 엄마들은 모두 나뚤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동양 사람과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서 다리가 되어준다.( 나뚤은 학교에 오면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인사하고 안부를 묻느라 매우 바쁘다.)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본인들의 언어에도 역시나 마찬가지다. 하긴 무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이고,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왕과 왕비를 단두대의 이슬로 보낸 역사가 있으니, 그 자부심은 어디 내놔도 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역사를 가지고 있는 그 언어도 자부심이 강해 보인다.
세계 어느 나라에나 프랑스 학교가 있다. 프랑스 대사관이 있는 나라에는 당연히 프랑스학교가 있다. 듣기로는 대사관보다 학교를 먼저 짓는다고 한다. 그들의 교육과 언어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어찌 보면 영어보다 활용도가 떨어지는 언어이다. 세계의 공용어는 영어로 통한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영어보다 자신들의 언어를 더 고집하는 것 같다.
그들의 고집과 자부심이 그들의 필기체 글자에 그대로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