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정답이 있을까? 내가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발자취에서 옳고 그름이 존재할까?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조금 더 나은 선택은 있겠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정답과 오답은 없다. 인생의 선배랍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요즘 말로 '꼰대'라고 한다. 꼰대는 본인이 살아온 삶이 제일 치열했으며 제일 힘들었고, 나는 그런 고난을 이겨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선택이 잘못되었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 방향을 지시하는 거겠지.
'라떼는 말이야?'
물론 꼰대의 종류는 다양하다.
들어주는 척, 이해하는 척, 인정해주는 척하지만 결국 '너는 역시 어리군.'이라고 얼굴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의 유형.
'아직 어려서 그래.' 하며 나이로 모든 것을 누르려고 하는 유형.
그리고 위에 적었듯이 '내가 너 나이 때 말이야? 나는 치열했어.' 하는 유형. 등.
물론 여전히 삶의 방향을 고민하거나 당장 선택해야 하는 것들이 앞에 놓여 있을 때 조언을 구하는 어른이 나에게는 있다. 그들은 나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밥 블레스 유라는 예능에서 이영자 씨가 말씀한 문장이 있다. '나이는 노력 없이 먹는 것에 불과하다.' 너무나도 맞는 말에 손뼉을 쳤던 기억이 있다.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너무 답답한 직원이 있었는데 업무 인수인계를 해주던 분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그냥 일을 못해도 어려서 그러겠거니 생각하고 귀엽다고 생각하려고 해요.' 나는 그 생각이 너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마인드였기 때문이다. 나는 웃으며 일을 하는데 나이가 많고 적음이 어디 있냐고 하였다.
나 또한 적은 나이가 아니고 나는 이직 준비와 대학원 진학 준비를 하고 있다. 적은 나이가 아니지만 많은 나이도 아니고 충분히 도전할 수 있는 나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더 늦지 않게 마음을 다잡고 있다. 어느 날 친하다고 생각했던 회사 선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잖아. 어디 받아주는 나이 아니야. 다른 떨어질 시험을 보지 말고 여기에 올인을 해야 해. 나도 네 나이 때 여기에 올인을 해서 모든지 다 했어.'
그 날 나는 우울했다.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했을까 속이 상했다. 그 사람이 그의 삶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것들을 인정하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이 정답일까? 그럼 내 삶은 틀린 것일까? 내 선택은 어리석은 선택인가? 끊임없이 강요하던 그의 말에 나는 표정관리를 하지 못했다. 어떤 삶을 선택하든 나의 기준과 나의 가치와 맞지 않더라도 내가 정답이 될 수 없고, 타인의 삶도 정답이 될 수 없다.
꼰대가 되지 않으리. 나는 늘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돌아보려고 노력한다.
공감능력의 부재
내가 좋아하는 책 구절에 이런 것이 있다. 어른이 슬퍼하고 있는 18살 고등학생에게 말한다. 그건 앞으로 살아갈 삶에서 슬픈 축에 들지도 않아. 그건 슬픈 것도 아니야. 앞으로 살아가다 보면 슬픈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학생이 말한다. 저는 제가 살아온 삶에서 가장 큰 슬픔인걸요? 그렇다. 그 사람의 감정은 이제까지 살아온 중에 제일 슬플 것이다. 그 슬픔을 공감하는 것이 아닌 네가 슬픔을 알아? 내가 더 슬퍼봐서 아는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일까.
나이가 들면서 인문학에 대한 중요성을 더욱더 체감하고 있다. 나의 전공은 사회학이다. 나는 전공 수업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공부했었다. 인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시각이나 방향이 조금 더 넓어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전공이 사회에 나와서 직장을 잡거나 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많지만 인문학은 필수로 배워야 한다. 최근 기업이나 관공서에서도 인문학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와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한 것들이 점점 문제로 발견되고 있음이라.
원래 사람은 이기적이어서 남이 걸린 암보다 내가 걸린 감기가 더 아픈 법이다. 내가 하는 일이 제일 힘들고, 내가 제일 아프다. 이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 힘들다는 것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놀랐었다. 힘들지? 일이 많지? 어때 일은 할만해요? 그들은 내 입에서 힘들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원래 내가 하는 일이 제일 힘든걸요. 사람들의 불행은 타인과 나를 비교하면서 생긴다. 나는 이렇게 일이 많은데 저 사람은 왜 일이 없지? 왜 나만 힘든 거야? 왜 나만 이렇게 일이 많아? 왜 나만 이렇게 불행하지?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거야? 왜 나만... 나만...?? 나는 이런 사람들이 너무 싫다. 무언가 개선해야 할 점을 이야기하면.
'예전에는 더 심했어. 지금은 많이 나아진 거야.'
'나 때는 말이야. 어휴 말도 마. 지금 엄청 좋아지고 있는 거야.'
이런 집단은 발전이 없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힘들다고 말하길 강요하면서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면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는데 왜 힘드냐고 한다. 나이 든 사람만 꼰대가 아니다. 요즘에는 젊은 사람들도 꼰대가 많다. 조언과 강요를 구분해야 한다. 진심으로 상대방을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조금 더 조심스러워야 하고 조금 더 어려워야 한다. 꼰대는 공감능력의 부재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삶이 다 치열했고, 그 앞에서 놓여 있는 선택지 중에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물론 최선이 아닌 최악을 피해 가는 것을 선택하기도, 선택을 피해 가기도 하고, 잘못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에 후회도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누구도 처음 살아보는 인생에서 후회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을 수는 없다. 그저 다양한 선택들이 모여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그것은 내가 선택한 삶이니 내가 감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또 한 뼘씩 자라고 있겠지.
'나'라는 인생과 감정에 취하지 않고 타인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언제나 내가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길. 나의 인생과 타인을 비교하며 타인의 삶을 판단하지 않길. 남에게 조언이랍시고 상처를 주는 일이 없길.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갈 수 있도록 늘 공부하고, 경계하길. 11월의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