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버리는 일을 그만두었다

과거의 상처를 대처하는 법

by 왼손별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의 기록은 늘 찢어버렸다.
그런데, 못난 글씨마저도 결국 나라는 걸 깨달았다.
상처를 감추는 대신, 가만히 안아주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1. 일기장이 얇아졌던 이유

끄적이는 걸 좋아한다.

하루가 끝나면 꼭 다이어리를 펼친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다시 보면, 일기장에 적힌 글이 마음에 안 드는 날이 있다.

그럴 땐 늘 그 페이지를 찢었다.


매주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면서 노트에 말씀을 기록한다.

지난주 컨디션이 별로였는지, 설교 노트에 적힌 글씨체가 엉망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찢지 않기로 했다.

못난 글씨마저도 나의 일부니까.


#2. 이별을 받아들이는 단계

이별을 당했건, 고했건, 사랑한 사람이 지나간 자리는 늘 아프다.

여러 번의 이별을 겪다 보니, 그 뒤에 따라오는 감정에도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가장 무서운 건, 과거의 기억이 미화될 때다.

그럴 때면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내가 너무 섣불리 헤어지자 했나?'

'만약에 내가 조금 더 참았다면, 조금 더 이해했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그렇게 '만약지옥'에 빠진다.

개미지옥보다 무섭다는 그곳.


자책하는 단계가 끝나면 분노가 시작된다.

"내가 진짜 남자 보는 눈이 없나?"

그러면서 X를 천하의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그러면 뭐 달라지나?

내 행동에 대한 후회도, 내 선택에 대한 실망도 하지 않기로 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는 법을 연습 중이다.


#3.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준 교훈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넷플릭스에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가 화제다.

처음엔 그저 흥미로웠다. 아이돌이 귀신을 때려잡는다니. 설정도 신선했고, 노래도 중독성 있게 잘 만들었다. 배우 이병헌, 김윤진, 그룹 트와이스 멤버 등 익숙한 목소리의 더빙도 반가웠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을 보다 눈물을 흘릴 줄이야.


주인공의 서사가 마음을 자극했다. 주인공은 자신의 비밀을 오랫동안 감춰왔다. 결점과 두려움은 숨겨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자신의 결핍을 밖으로 드러내면서 비로소 성장한다.


케이팝데몬헌터스(케데헌) 삽입곡 'Free'


날 옭아매는 수많은 비밀
날 위험하게 만드는 수많은 상처
네 안의 어둠 네게만 있는 게 아니야
더 이상 도망치지 말고 함께 맞서 볼래?
대면하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어
과거는 과거에 두고 가벼워져
─ 케이팝 데몬 헌터스 삽입곡, 'Free'


오랫동안 과거의 상처에 발목 잡혀 있는 내가 겹쳐 보였다.

못난 과거마저 인정해 주기, 앞으로 나가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과제였다.


그러니 마음에 안 드는 페이지를 찢어버리려고 애쓰지 말자.

찢는다고 과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글을 쓰며 마음을 위로해 준 노래 한 곡을 남깁니다. Kyu6in - '아닌거지 뭐' (Feat. 도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