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차마 못했던 말
미워했던 날도 있었고, 다시 돌아오길 바랐던 날도 있었다.
이제는 그저, 그 사람이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
"너는 전 연인을 언제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해?"
'환승연애'라는 연애 프로그램을 즐겨 봤다. 전 연인(X)을 놓아주지 못하는 미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인연이 나타났을 때 느끼는 설렘, 그 양가감정을 잘 녹여낸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환승연애'를 즐겨보던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전 남자친구들 중에서 같이 나갈 수 있는 사람 있어?"
우리는 각자의 X를 떠올렸다.
대개 X를 마음에서 완전히 떠나보낸 경우 출연이 가능하다고 했다.
나의 X가 다른 이성과 썸을 타는 걸 눈앞에서 바라보는 감정은 어떨까.
내가 가장 오랫동안 못 잊었던 H를 떠올렸다.
H와 헤어지고 나는 꽤 빨리 다음 연애를 시작했다.
좋은 사람을 금방 만난 것도 사실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H보다 먼저 연애를 하고 싶었다.
나는 'H가 나보다 먼저 새 연인을 만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빠르게 다음 사랑을 찾았다.
얼마나 유치하고 못난 감정인가.
그리고 떠나는 H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내뱉었다.
'오빠는 나보다 괜찮은 여자 절대 못 만나!'
슬프게도 나의 바람은 이뤄졌다.
H는 오랫동안 새로운 사랑을 이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상황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도리어 미안했다.
전 연인의 행복조차 빌어주지 못했던 내가 너무 못나 보였다.
이제는 정말, 그가 잘 지내길 바란다.
그의 오늘을 넉넉히 안아줄 사람을 만나길,
나와의 추억을 덮을 만큼 행복한 사랑을 하길,
되돌릴 수 없는 날들 앞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않길,
나를 떠올리는 일이 적어지길,
언젠가 길에서 마주치면, 그저 작은 미소 하나만 비춰주기를.
나는 이제야 비로소, 그를 완전히 보내줬나 보다.
비단 H 뿐이겠나.
지나간 사랑들을 떠올리니, 미안하고 또 감사하다.
그들은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사랑을 줬고,
그들이 전해준 온기 덕분에 나는 삶에서 따뜻한 조각들을 안고 살아갈 수 있었다.
대단한 사람도 아닌 나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줬고,
서툴고 미숙했던 나를 인내해 줬다.
덕분에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고,
감사히 받은 그 사랑만큼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됐다.
나중에 우연히 만난다면, 서로의 연인이었던 걸 후회하지 않게 우리 더 멋있어지자고.
각자의 자리에서 뜨겁게 사랑을 하며, 오늘을 성실히 살아가자고.
나를 스쳐간 인연들에게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글로 남긴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