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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총각 Dec 15. 2018

가짜 아들

피서

 7월 초 어느 날. 포도와 자두로 유명한 김천의 한 포도 농가.

'하...덥다... 정말 더워도 너무 덥다...'


이날은 밖에서 숨쉬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였다.


"이런 날은 일 못해"


혼자 생활하시며, 포도 농사를 지으시는 아버님은 날이 너무 덥다며 오전에 하던 작업을 멈추고 집으로 들어가셨다.


"아버님, 늦었지만 아침 식사하시죠"


"난 됐어, 난 나갔다 올테니까 알아서 챙겨 먹어 알았지?"


"네?"


아버님은 텃밭에서 따오신 가지와 오이, 감자 그리고 애호박을 탁자에 올려두시고 쿨하게 밖으로 나가셨다. 아버님과 이야기하면서 친해지긴 했지만, 처음 보는 나에게 집을 맡겨두고 나가실 줄이야... 어찌 됐건 나는 아버님이 주고 가신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었다. 

내가 차려먹은 밥상

아버님 댁에서 혼자 아침 겸 점심을 만들어 먹고, 오전에 일하는 동안 흘린 땀을 씻어내기 위해 샤워를 했다. 상쾌한 기분과 함께 졸음이 쏟아졌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낮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안 오신 건가?'


나는 홀로 오전에 하던 작업인 '포도 박스접기'를 다시 시작했다. 이날은 할 일이 많지 않아 작업을 일찍 끝내고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마침 아버님이 들어오셨다. 


"가짜 아들, 나랑 막걸리나 한 잔 할까?"(아버님은 내가 지내는 동안 나를 '가짜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좋죠"


막걸리를 정말 좋아하시는 아버님은 막걸리를 드시며 포도 농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 혼자 사시게 된 이유 등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셨다. 나도 이런저런 고민들을 이야기하며 깊은 대화를 이어갔다. 


"가짜 아들! 내일은 오전에 할 일이 있는데, 그거 빨리 끝내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네! 알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포도에 영양제를 뿌려주는 작업을 시작했다. 영양제를 가득담은 등짐을 지고 비닐하우스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는데 아버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포도에 영양제 뿌리기 작업

"가짜 아들! 대충 정리하고 몸보신하러 가자"


"몸보신이요?"


"요 며칠 더웠는데 몸보신해야지"


그렇게 아버님과 나를 차에 태우고 동네 근처 슈퍼로 향했다. 이곳은 동네 주민분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마을분들은 시간만 되면 이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화투를 치셨다. 지난번 나를 집에 두고 가셨던 곳도 바로 이 슈퍼였다. 아버님은 이곳에 계시는 분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가자고 하셨다. 


"안녕하세요"


동네 어르신: "이게 누군가? 아들이야?"


아버님: "가짜 아들!"


그렇게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차를 타고 산속 계곡으로 향했다. 

계곡

"우와 여기 정말 좋은데요?"


"그렇지? 많이 먹고 푹 쉬다 가자고"


아버님은 내가 무더운 며칠 동안 고생했다고 하시면서, 이날 같이 온 마을 주민분들에게 크게 한턱 내셨다. 넓찍한 평상에 앉아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먹는 닭백숙 맛은 무더웠던 여름을 용서하게 만들었다. 


"밥 다 먹었으면 수박 먹자"


식사를 마치고 어르신들이 준비해오신 수박 그리고 각종 주전부리들이 등장했다. 이런 곳에서 막걸리가 빠질 수 있으랴. 그렇게 몇시간동안 먹고 자고 쉬었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생각해보니 무척 더웠던 이번 여름 동안, 농가를 돌아다니면서 일을 하느라 피서를 즐기지 못했었는데, 여행 기간 처음으로 휴식이 있는 피서를 즐겼던 것 같다.

평상 위에서 먹었던 닭백숙

"어때? 좋지?"


"네, 너무 좋은 곳이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님 덕분에 올해 피서를 제대로 즐기는 것 같아요"


"더운 날 일만 시키고, 밥도 제대로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 


사실 할 일이 많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나를 받아주셔서 정말 감사했었는데, 이런 말씀을 들으니 괜히 민폐만 끼쳤던게 아닌지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또 김천 지나갈 일 있으면 꼭 놀러 와, 잊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올 때는 꼭 막걸리 한 병 사 오고!"


"네. 막걸리 한 짝 들고 오겠습니다! 대신 그때는 가짜 아들 말고, 아들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가짜 아들."



2018. 07.13-07.17

경북 김천에서


2018년 5월부터 10월까지, 지역 음식과 지역 농산물을 주제로 전국 배낭여행을 했습니다. 시골 농촌에 가서 일손을 도와드리고, 집 밥을 얻어먹으며 151일간 전국을 돌아다닌 여행. 직접 체험했던 농사일, 각 지역 농부님들의 다양한 이야기 등. 여행을 하며 느낀 모든 것을 전하고 싶습니다.


@도시에서온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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