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은모래비치와 몽돌해변에서 만난 사람들
남해의 햇빛은 갈수록 쨍쨍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서울 가기 전에 금산 꼭대기까지 맑게 보이는 모습을 여러 번 보게 되어 괜히 반가운 마음이다. 오늘은 오전부터 많은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는 날이다. 지난밤에 늦게까지 작업을 했더니 약간은 피곤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눈이 절로 반짝반짝해진다.
첫 번째 인터뷰는 남해 토박이이자 사진작가로 활동 중인 희수 님이다. 남해 읍내에서 마파람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다. 자그마한 사진관 안에 아기자기하게 꾸며둔 모습이 예뻐서 자꾸 눈길이 갔다. 마파람 사진관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멋진 사진으로 처음 알게 되었다. 남해에서는 적극적으로 이주 청년들과 교류하며 대외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토박이 청년이 많지 않다. 워낙 인간관계가 좁고 깊다 보니 어디선가 활동을 하는 게 말이 퍼지기 쉬워, 으레 다들 조심하는 분위기라서 그렇단다. 그런데 그 몇 안 되는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희수 님이다. 남해로 이주 온 청년들에게 흔쾌히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이 멋지다. 해외에 나가면 모든 국민이 민간 외교관이듯이, 이곳에서는 토박이 청년들이 이주 청년들에게 민간 중간지원조직의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첫 인터뷰를 마치고 잠시 숙소로 들어가 쉬다가 점심을 먹고 다시 나왔다. 두 번째 인터뷰는 상주 은모래비치 바로 앞에 있는 상주번영회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연결학교에서 만난 사무장님을 뵈러 왔는데,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상주면장님과 번영회 회장님이 즉석에서 합류하여 몇 가지를 여쭤볼 수 있었다. 여러 모로 운이 좋은 날이다. 기간제 공무원으로 일하러 오신 사무장님은 의외로 남해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주민이었다. 심지어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학교 선배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다. 후배가 왔다고 흔쾌히 많은 이야기를 나눠주시고 자료들을 아낌없이 보여주시고 공유해 주셔서 정말 감사한 마음뿐이다.
세 번째 인터뷰는 다랭이마을에 있는 카페 톨 사장님인 순영 님과 함께했다. 마찬가지로 연결학교에서 만난 인연이다. 카페 톨을 통해 귀촌한 친구들이 꽤 있다고 얘기를 들었는데, 알고 보니 남해에서 한 달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최초로 운영하기 시작한 곳이 이곳이라고 한다. 숙소를 제공하고 4일 일하고 3일 쉬는데, 3일 간 쉬며 남해를 여행하고 여행기를 제출하면 원고비를 주신단다. 그렇게 쓴 원고들을 모아 책으로 출간하신다. 열정으로 남해에서 여러 기획을 추진하고 계시는 사장님께 많은 에너지를 받았다. "일단 남해로 주소를 옮겨놓고 논문을 써보세요. 틀림없이 잘 나올 겁니다." 벌써라도 명예 남해군민이 된 기분이다.
긴 인터뷰를 마치고 순영 님이 카페 톨의 다른 공간들을 구경시켜 주셨다. 옛날 방앗간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톨방앗간'에서는 다랭이마을의 쌀을 활용해서 쌀빵을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바로 옆에 지붕에 꽃이 그려진 집이 하나 있는데, 직원 숙소로 쓰고 있는 공간이다. 다른 곳에 있던 한옥을 이축해 와서 만든 공간이란다. 차 한 대도 다니기 힘든 이곳 마을에 공간을 하나둘씩 만들어가고 있는 열정과 에너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화첩서가'라는 공간이 나온다. 오래된 소외양간 공간을 개조하여 만든 전시장이다. 첫 전시로 '벼의 일 년'이라는 전시를 진행 중이었다. 모내기부터 추수와 도정까지, 봄에서부터 가을까지 이어지는 벼의 일 년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밥 한 공기에는 쌀이 몇 알이나 들어갈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전시는 까만 종이 위에 쌀알을 하나하나 펼쳐서 센 결과물로 끝난다. 관람객들은 한 되의 쌀을 기념품으로 가져갈 수 있다. 입장권에는 굿즈로 받아가는 쌀 가격이 포함되어 있다. 종이봉투에 정성스레 쌀을 두 번 감싸 마끈으로 묶어서 직접 포장했다.
화첩서가 바로 옆에는 이제 막 오픈을 앞둔 여성 전용 게스트하우스 '여여가'가 한창 준비 중이다. 한옥을 리모델링하는 데 이제는 도가 튼 사장님의 정수를 본 기분이다. 특히나 입구에 오래된 기와를 활용한 조명을 만드신 것이 마음에 드신단다. 가구 하나, 바닥재 하나 다 신경 써서 들인 것이 눈에 들어온다. 직접 준비하는 정성이 없다면 만들 수 없는 공간이다. 각 숙소 창문 밖으로는 다랭이 마을 특유의 돌담과 풀숲이 보인다. 다음에 남해에 온다면 이곳에서 며칠은 묵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분명 따뜻하고 정겨운 경험을 하게 될 것 같다.
작은 틈 하나에도 화단을 만드신 사장님의 정성에 감동했다. 슬슬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한다. 여여가 밖으로 나오니 넘실거리는 바다가 보인다. 작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려는데 사장님이 따뜻하게 손을 한번 잡아주신다.
인터뷰를 하러 들어가기 전에는 정신이 없어 그냥 눈으로만 지나친 다랭이논에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아까는 쨍쨍했는데... 역시 사진은 시간이 허락할 때 바로 찍어야 하는 건가 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바로 두모마을로 돌아가려다가, 생각해 보니 그 유명한 몽돌해변이 근처였던 것이 생각나 차를 돌려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가는 길에 전망대가 하나 보여 잠시 차를 세우고 바다와 함께 있는 다랭이 마을을 찍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산을 경작하여 논으로 만든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한다.
어제 갔던 물건마을의 해변도 자갈로 된 해변이었지만, 몽돌해변은 괜히 그보다 자갈 부딪치는 소리가 더 예쁜 것 같다. 둥그런 만 안에 마을과 산이 해변을 둘러싸고 있다. 잠시 슬리퍼를 신은 채로 바다에 들어가 시원한 바닷물을 느꼈다.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잠시 바다와 나만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겁다. 자갈이 파도에 쓸려 저들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한 곡의 음악 같다. 여러분도 그 순간을 함께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남해의 해수욕장에는 어디든 발 씻을 공간이 있다. 그러니 슬리퍼를 늘상 챙겨 다니고, 별 두려움 없이 바다에 발을 담근다. 역시나 공중화장실 옆 수전에서 발을 씻고 나오려는데 어르신 두 분이 웬 마른 가지를 탁탁 치는 게 보인다. 용기를 내어 여쭤보니 참깨를 털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아, 돌창고 창밖에서 만났던 바로 그 하얀 꽃이 참깨였다. 벌써 말려서 터는 집이 있나 보다. 햇빛에 구워져 뜨끈한 몽돌 위에서 말라가고 있는 참깨는 걸러지고 볶아져 우리의 식탁 위에 고소한 향을 내며 오를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노을빛이 참 예쁘다. 공유주방으로 들어가니 웬 맑은 국물의 고깃국이 아직 따뜻한 상태로 냉장고에 들어가 있었다. 엄마와 마시다 남은 무알콜 맥주 한 캔을 꺼내고, 고깃국에 누룽지를 하나 풀어서 먹었다. 고된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 정도는 먹어줘야 다음 작업을 할 힘이 난다. 라운지로 돌아와 노트북을 켜고 다시 일을 한다. 낑깡이와 인절미가 와서 괜히 참견한다. 노트북 뒤에서 나오는 뜨끈한 열기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낑깡이는 노트북 화면 양쪽에 턱을 비비며 제 것이라 주장해 본다. 미안한데 내 거야. 친구에게 카톡을 보내는데 낑깡이도 한 줄 쓰고 간다. 그대로 보냈더니 아주 귀엽단다. 나도 귀엽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