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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8시간전

28. 성인을 뵙고 물러나면

-알성퇴술(謁聖退述)

우리 어렸을 때 숙제로 일기잖아요? 열하일기의 절반은 일기입니다. 열하일기를 읽기 시작했을 때, 그날의 날짜와 날씨를 꼬박꼬박 쓴 걸 보고 어른 연암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일기 형식을 잘 지키는 게 새삼스러웠습니다. 하기는 방학숙제 일기 한 달치를 한꺼번에 쓰던 어린 시절에도 가장 애먹은 것이 날씨였지요. 요즘도 나는 여전히 날씨 없는 일기를 쓰거든요. 연암의 노정을 따라 지도를 펴놓고 짚어가며 읽는데, 열하 이후부터는 일기체가 아니라 제목을 달아 주제를 펼치는군요.  연암은 연경 시내투어를 하며 순천부학에서 조선관까지의 견문은 알성퇴술이라 불렀습니다. 조선 삼사(三使)와 함께 공자 사당에 참배하니 알성이요 그 이후에 물러나 글로 쓰니 퇴술입니다. 공자에 관련된 시설들을 주로 기록하며 다른 것도 함께 언급했답니다.


원나라 시대에 한 승려가 절에 불상을 안치하려는 순간입니다. 공교롭게도 명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북경이 함락되었습니다. 공자의 사당에 난입하지 말라는 군율이 있다니, 승려는 공자의 신주를 빌려와 대웅전 안에 모셨습니다. 다행히도 봉변은 면했으나, 누가 감히 이 위패를 옮기겠습니까. 명나라가 멸망하고 북경이 청나라의 수도가 된 다음에야 이곳은 순천부학(順天府學)이 되었습니다. 순천부학은 공자의 사당과 교육시설을 갖춘, 지금의 성균관 대학교 격입니다.  승려가 얼떨결에 한 일이 석가의 집을 공자의 집으로 바꿨습니다.

  

명나라 초엽에 고려의 김도가 태학(太学)에 입학하여 과거 급제를 하고 진사가 되어 귀국하였습니다. 1567년에는 천자가 국자감(国子监)에 와, 조선의 이영현 등 여섯 감생더러 의관을 갖추고 참배하도록 했답니다. 태학에서 공자에게 참배하는 건 선비라면 으레 하는 일입니다. 연암도 부사와 서장관과 함께 앞뜰에서 재배례를 행하였습니다. 열하 태학에서의 참배나 지금 연경 태학에서의 참배나 비슷하군요. 열하에서는 추사시와 왕곡정 같은 벗들이 가이드를 해줬지만, 연경의 벗들은 시간이 안 맞았나 봅니다. 보고 싶은 비문(碑文)도 몰라서 못 찾았습니다.      


국자감의 넓이는 580칸입니다. 태학의 조교인 구양의 말로는, 그 밖에도 관련 건물이 셀 수 없답니다. 국자감은 한나라 때는 1800칸에 감생 3만 명, 당나라 때는 6200칸이었습니다. 명나라 때는 1371년에 2782명, 1393년에는 8124명, 1421년에는 9884명이 입학했습니다. 아무리 청나라가 뽐내어도, 그날 연암이 본 바에 따르면 십중팔구는 빈방이었습니다. 며칠 전 석전(釋奠)의 참석자가 400여 명인데, 만주인과 몽고인뿐이요, 한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암은 텅 비어있다손쳐도 깨끗이 정돈된 것만은 본받을 만하다고 훈훈하게 수습합니다.     


다음날에는 역대비(歷代碑)를 보았습니다. 계속 돌아다니는 한편 밤샘 토론도 하고 있으니 나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강행군이 아닐 수 없군요. 연암은 지난번의 '호질'은 정진사를 동원하여 베꼈는데 이번에는 역관 조달동을 섭외해두었습니다. 문방사우를 들고 비석을 찾아가 베끼고 이동하며 또 베끼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좀 넓어야 말이지, 투덜거리며 줄달음을 쳐서 쓰고 또 쓰지만 다 베끼지 못하네요. 또 올 일이 없을 터이니, 지금 다 봐버려야 하는데, 글은 많으나 두루 열람을 못하니 유감이라는 연암의 말에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슁 날아가 찰칵찰칵 찍어주고픈 심정입니다.       


명조진사제명비(明朝進士題名碑)도 봅니다. 명나라 이백여 년에 비석을 세우고는, 공간이 부족해 더는 안 세운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비석으로 촘촘한 파밭을 이룬 걸 보고, 앞으로 어디에다 비를 세우냐!, 고 연암이 제 일처럼 걱정을 합니다. 걱정도 팔자유! 선조의 진사비를 위한 공간을 자손이 있다면 어떻게 안 만들겠습니까. 전남 장성의 백양사 쌍계루는 한때 화재로 현판이 죄다 소실되었습니다. 저명한 인물들의 시는 복원했지만 무명씨(?)는 놔뒀죠. 그런데 자손이 제발 걸기만 해달라고 자비(自費)로 현판을 만들어 옵니다. 정몽주와 내 조상의 글이 나란히 걸린다면야 몇십만 원이 문제입니까?


열 개의 돌북- 석고(石鼓)도 있습니다. 주나라 선왕 시절의 유물입니다. 창려 한유는 사방에 흩어진 이 돌북들을 태학에 가져와 보존하자는 시를 썼고 소동파도 <속 석고가>를 썼습니다. 연암은 소년시절에 이 시들을 배웠지요. 석고에 새겼다는 글의 전문(全文)을 한 번 봤으면, 하는 (당시에는얼토당토 않은) 소원을 품었답니다. 그런데 26년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석고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반적이 쓴 석고문음훈비(石鼓文音訓碑)를 입으로 읊조리고 있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를 모르겠어요. 이 부분을 읽으며 내 손가락들도 그 돌북의 물성(物性)을 더듬어 절로 꼼지락거립니다. 어이, 빨리 인증샷 찍어! 라고 외쳤을 순간이군요.


문승상사(文丞相祠) 송나라의 승상 문천상의 사당입니다. 문천상은 구경꾼 만 명 앞에서 남향(南向)하여 두 번 절하고 처형당한 충신입니다. 뜻을 꺾지 않고 목숨을 저버린 그에게 원나라 황제는 나중에 추증과 시호를 내렸답니다. 나라의 녹을 먹은 자답게 그 나라의 흥망에 책임을 지고 마땅히 죽어야 할 줄 알았습니다. 조선이 일제에 넘어갈 때도 스스로 목숨을 저버린 인물이 있었습니다. 황현이었습니다. 관직이 없으니 사직을 위해 죽을 의리가 없지만, 오백 년동안 사대부를 기른 나라가 망할 즈음에 죽는 선비 한 명이 없으면 애통하다며 자결을 합니다. 나는 조선 선비 황현이 문천상보다 더 낫다고 봅니다. 구례에는 황현기념관도 있지요.        

연암은 관상대(觀象臺)를 보며 친구 석치의 말을 기억합니다. 우리나라 강진현 북쪽 끝에 나온 곳은 북극 몇 도인데, 황하가 회수에 들어오는 어귀와 직선으로 되어 있으므로 탐라의 귤이 바다를 건너 강진에만 오면 탱자가 된다는. 황하는 북위 35도에서 시작하여 32~34도 사이에 있는 회수(淮水)로 들어옵니다. 회수는 중국의 남북을 가르는 경계로 남쪽의 귤을 북쪽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그 회수입니다. 탐라(제주)는 북위 33.44도로 회수 남쪽이고 강진은 북위 34.64도로 회수 북쪽입니다. 탐라의 귤이 강진에서는 진짜 탱자가 되나 안 되나 찾아보려다가 나는 제풀에 사그라들었습니다. 지구 온난화 시대에 탐라의 귤이 강진의 탱자가 되겠나, 여전히 귤일 테지요.     


시원(試院)의 언급도 재미있었습니다. 벽돌담 위에 가시를 얹은 건물이에요. 수천 채의 집과 집 사이에 반 칸의 간격을 두어 창문으로 볕이 들어 옵니다. 판자문에 작은 온돌, 부엌과 목욕탕까지 있으니, 현대판 원룸보다 훨씬 더 인도적(人道的)이네요. 거인(擧人)의 시험지는 60cm*186cm입니다. 잘잘한 글씨로 천 자(字)는 담겠습니다. 예부의 이 시험지에는 논제가 있고, 직함과 성명과 비평문을 쓰게 되어 있으며, 채점관의 성명도 써 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평점란에 피드백을 소상하게 써주는 겁니다. 사제지간처럼 떨어지면 떨어지는 이유를 알려준다니, 우리도 그랬으면 참 좋겠어요.      


조선관(朝鮮館)은 조선 사신의 숙소입니다. 연암은 이 숙소와 함께 지난해의 화재 사건을 언급합니다. 한밤중에, 아비규환의 현장에 장갑군 수천 명과 물수레 몇십 대가 달려왔답니다. 연거푸 수레 물통에 물을 길어 붓고 소방관들은 벙거지와 갖옷을 적셔가며 도끼·갈퀴·낫·창을 들고 헐고 돌격하여 곧 불을 껐답니다. 물을 부을 때 한 방울도 허비하지 않았다느니 불을 끄면서도 잃어버린 물건이 없다느니, 하며 연암은 중국의 엄격한 규율에 주목합니다. 똑같은 성리학 나라들인데 청나라가 효율적으로 하는 일을 조선이 못하라는 법이 있느냐?,는 거죠.  본받을 만한 것은 콕 짚어 백성이 편안하도록 힘써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연암의 목소리가 살짝 얹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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