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동지팥죽의 새알심
-조선과 중국의 과거제도
별별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것처럼 보여도 연암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동지팥죽의 새알심처럼 숨겨져 있다. 그게 새알심인 줄은 어떻게 아냐 하면 오늘날의 내가 들어도 공감이 가는 주제를 다루었으면 영락없이 연암의 속엣말이다. 당대의 문제는 세월이 흐르면 없던 일이 될 수 있어도 당대에 무시당하던 문제라면 앞뒤 세대에 다 해당되는 보편적인 문제일 수가 있다. 이런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시험제도이다.
연암은 과거시험을 한 번 봤다. 그리고 그 한번에 학을 떼고 두 번 다시 안 보려고 했다. 두번째는 주변의 권유를 받아 시험장까지 가기는 했으나 시험지에 끄적끄적 소나무와 바위를 그리고 나왔더란다. 나중에도 과거를 안 본 것은 아닌데 거듭 낙방을 했다고 한다. 개혁적인 비판과 제안을 주로 내놨으니 누가 선뜻 합격시켜 줬겠는가. 연암과 다산 두 사람이 좌청룡 우백호처럼 정조 임금의 곁에 있었더라면 조선판 문예부흥 시대를 완성할 수도 있었으련만..., 하는 아쉬움은 비단 나만의 감상이 아닐 것이다.
그 연암이 청나라의 과거제도를 살펴보았다. 정리하다 보니 어라, 중국이 조선에 비해 공정하게 관리하는 편이네. 오랑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도 역대 중국의 좋은 것은 다 물려받아 쓰고 있네. 조선도 청나라의 좋은 점이라면 받아들여 배워 사용해야겠다고 강조하게 된다. 청나라의 과거제도는 향시와 회시, 전시와 조고시의 네 종류가 있다.
1. 향시(지방고시)
1) 시험장-사서와 산문 3편+성리론(性理論) 1편=합격하면 거인 칭호+회시 응시 자격 부여-주야
2) 시험장-오경과 산문 4편=배율(排律-장편시,) 1편-주
3) 시험장책문 천(千자 산문) 5편(3조-역사/2조-시무(時務)-주야
2. 회시-향시 합격자만 대상-향시와 동일-진사 자격
3. 전시-책(策) 1편-시사 만자 산문-무오류시 한림(翰林)에 입직-주야
4. 조고시-1) 조(황제의 지시문)2) 고(황제의 교서)3) 논(논문) 4) 시-주
향시는 지방에서 치르는 수능시험이다. 시험 문제는 전국적으로 똑같지 않았을까? 응시생은 시도 짓고 논술도 써야 하니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차가워야 했으리라. 기출문제집도 시중에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것이다. 역사에 관해 3편, 시사에 관해 2편을 천자(千字)논술로 써야 했다. 이렇게 사서와 삼경을 다 배워 읽고 외우고 그 서평을 쓰고 제 생각까지 펼치고 나야, 선비 인증을 받아 거인(擧人)이라고 부른다. 십 년이 지나면 고을 수령쯤은 한다니, 듣기만 해도 좋은 나라라는 느낌이 든다.
문제는 회시다. 향시와 시스템은 똑같아도 출제되는 문제는 당연히 더 어려울 것이다. 그래야지, 본고사인데! 그래도 고향의 향시와 수도 연경에서의 회시는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 일단 척 봐도 나보다 더 똑똑할 것처럼 보이는 수천 명의 수재들과 두 눈 부릅뜨고 경쟁해야 한다. 연경에서는 거인들에게 방도 주었다. 방씩이나?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험을 주야에 걸쳐 치르니 감독관마저도 시간외 근무를 해야 한다. 마감 시간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 보니 설마 마지막 거인이 시험지를 제출해야 끝나는 걸까?
그런데 그 쬐그만한 방에 있을 것은 다 있다. 부엌과 온돌, 화장실과 욕실이 있다. 창문도 있어 볕이 다 들어온다. 오늘날의 원룸보다 시설이 더 낫다. 복지가 이렇게 두터운 경우는 보다 보다 처음 본다. 한 이틀은 점심식사와 저녁식사 두 끼를 스스로 해결했으리라. 일단 입실하면 출입금지일 터인데 식재료는 나눠주나? 도시락 들고 달려올 가족도 없는 지방 출신 거인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요리까지 배워야 했을까? 고려 사람인 김도가 태학 공부 3년에 명나라의 회시에 합격하여 진사의 신분으로 귀국했었다고 한다. 돌아와 중국의 과거시험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받았을 것 같다.
명나라 시절에는 과거시험장에 화재가 났었다. 시험장의 방이 무려 7500 개인데 90여 명이 죽은 걸 보면, 아마 한 동에서 난 화재였나 보다. 촌에서 올라온 어리바리한 누군가가 요리를 하다가 실수를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맹랑한 어떤 거인이 사건 사고를 위장하고 부정행위를 시도했으려나? 꼬장꼬장한 감독관이 시험장 문에 자물쇠를 채워 놨다고 한다. 만날 하던 일이었을 것이다. 왜 잠궜겠어? 잠그는 이유가 다 있지. 그런데 어쩌자고 인명사고가 났다. 감독관이야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았겠지만, 부정행위를 예방하려는 꼿꼿한 오기만은 참 경이롭다.
연암이라면 과거시험을 그렇게나 공정하고 엄격하게 운영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화재조차 부러웠을 수 있다. 겨울 혹한에 곱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먹은 계속 갈아대며 글씨를 써야 했던 조선의 선비로서는 과거시험 전용 건물의 따스한 실내에서 넉넉하게 써 내려가는 중국 선비의 우아한 자태를 상상만 해도 배가 아팠으리라. 조선에서는 과거 시험장에 방석 놓을 자리 하나뿐이요 그나마 실내에 있는 자들은 금수저들이다. 지방 선비들에게는 앞마당이나 제 자리였을까. 자리를 못 잡아 치고받는 몸싸움은 덤이다. 하루 종일 추위와 더위를 감당하며 발 뻗을 공간도 비좁았으리라.
연암은 허생전에서 중국을 이기는 방안 세 가지를 주장한다. 그 중에 사대부의 자제들을 엄선하여 중국의 과거를 보게 하자는 주장도 있다. 비록 소설에서일망정 무턱대고 한 말이 아니라 청나라 선진지를 견학하고 나온 말이었구나. 이완대장은 싫다는 허생을 억지로 졸라 창자속까지 게워내게 했었다. 중국과 한판 붙겠다면 지금이야말로 제이, 제삼의 김도를 길러낼 때가 아니냐. 이완이 만약 나 하나만이라도, 하는 생각에 제 아들을 중국에 보내는 일은 없었을까. 허생의 시험에 선뜻 만냥을 걸었던 갑부 변씨가 한양 최고의 영재를 청나라에 삼 년 장학생으로 보내는 일은 안 생겼을까. 허생의 시험(試驗)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