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 점 반

윤석중 시, 이영경 그림, 창비

by 곽영미

시를 그림책으로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한 편의 짧은 시를 보통 16개의 펼침면인 그림책 구조로 만드는 일은 어떨 것 같은가?

대부분 좋은 시의 글이 있으면 예쁜 그림을 넣어 그림책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를 가지고 그림책으로 만든 작업물들이 그리 좋은 평가를 받는 책은 많지 않다.

시의 좋은 이미지를 그림책 그림으로 축소 · 한정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 그만큼 시의 짧은 언어를 그림으로 표현한 그림책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표지와 표제지를 만나보자]

넉 점 반.jpg 표지(뒤-앞)

먼저 표지를 살펴보자. 여자아이가 뚱한 표정으로 호박 열매를 손에 쥐고 있으며, 개는 앞을 향해 보고 있다. 아이는 호박 열매를 따려고 하는 걸까? 어릴 때 그림만 한 호박 열매를 자주 딴 적이 있다. 따다가 걸리면 혼이 났지만, 소꿉놀이에서 저만한 호박 열매는 수박으로 쓰기에 딱이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옷차림과 넉 점 반이라는 제목을 통해 시대적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은 근대 아동문학가였던 윤석중이 1940년에 발표한 시이다.


윤석중.png 임응식, 〈윤석중〉, 1980, 젤라틴 실버 프린트, 33×24㎝, 국립현대미술관.

표제지에는 왼쪽에는 어릴 적 거실에 걸려있던 커다란 괘종시계가 보이고, [그리움을 담아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께 바칩니다]라는 헌사가 쓰여 있다. 넉 점 반이라는 제목과 괘종시계를 연결시켰다. 오른쪽에는 넉 점 반이라는 제목을 세로로 쓰고, 분꽃이 조그맣게 그려져 있다. 본문 이야기에 나오는 소재들을 잘 디자인해서 표제지를 완성하고 있다.

그림4.jpg 표제지


[본문을 살펴보자]

본문 첫 페이지에서는 왼쪽 상단에 호박꽃 줄기가 위에서 아래로 드리워져 있고, 오른쪽 그림에는 아이가 오른쪽 방향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다음 페이지에는 [구복 상회]라는 가게 이름이 보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가게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밌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가게 이름인 구복 상회는 ‘아홉 가지 복’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가게 앞에는 오늘날 부동산 중개소인 '복덕방' 표지판이 서 있고, 닭을 파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시대적 배경인 근대임을 알 수 있는 요소이다. 지금과 다르게 근대 시대에는 물건을 파는 가게에서 복덕방을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르는 닭은 파는 모습도 새로워서 눈길을 끈다.


# 근대 복덕방이 궁금하다면 http://www.koreanhistory.org/4694


넉점01.jpg 본문 부분 샷(shot)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

글은 이렇게 시작되며 그림과 거의 대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페이지에서는 방 안에서 고장 난 라디오를 고치는 할아버지에게 몇 시인지 묻는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이제 아이가 가게에 온 이유를 알 수 있다. 물건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엄마 심부름으로 시간을 물으러 온 것이다. 이 당시 시계가 가정마다 보편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그림은 아이는 밖에 있고, 할아버지 방안을 클로즈업했다. 할아버지 방 안에서 시계를 찾아보아라. 그리고 방안에 있는 오래전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추억의 물건들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추억을 떠올리면 좋겠다.


[넉 점 반이다.]

할아버지는 시계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넉 점 반은 몇 시일까?

아마 어린아이들은 이 말을 알아듣기 어려울 것이다. 넉 점 반은 '네 시 반'을 말한다. 그림은 시선이 뒤로 옮겨져서 이번엔 가게 안 아이의 뒷모습과 가게 안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가게라는 한 공간을 계속적으로 그려야 하기 때문에 작가는 그림 시선을 어디로 어떻게 해서 공간을 효율적으로 보여주고 그림에 재미를 줄지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가게 안에도 우리가 어린 시절 보았던 다양한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디딤돌 위에서 조는 아이의 모습이나 하얀 백열등 전구, 파리채 등등의 물건들이 익숙하다.


다음 장부터 가게를 나온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보통 심부름을 다녀오는 아이들의 이야기에는 아이들 특성상 심부름을 잊고 다른 놀이에 빠지거나 또는 강박적으로 심부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은 하나도 보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여기서는 다른 놀이에 빠지면서 엄마의 심부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이는 물을 먹는 수탉도 구경하고, 죽은 지렁이를 옮기는 개미 떼를 쳐다보다가 개미 거둥을 한참 앉아 구경도 한다. 그러면서도 [넉 점 반 넉 점 반] 되뇐다. 그림에는 돌담길에 아이 키보다 높게 피어난 빨간 접시꽃이 아름답게 그려졌으며, 처마 밑에 집을 지은 어미 새와 새끼 새들의 모습도 보인다. 아이는 개미를 구경하다가 잠자리에게 한눈을 뺏기고 이번엔 잠자리를 따라가면서도 넉 점 반을 계속 외운다. 그림을 보다 보면 개미들이 잠자리에게 지렁이를 뺏긴 것을 알 수 있다. 잠자리를 따라가다가 분꽃에 앉은 잠자리를 잡으려는 아이의 모습이 다음 장면에 그려진다.


이번에는 분꽃 놀이에 빠졌다. 아이는 아예 자리를 잡고 분꽃을 따 물고 피리를 분다. 분꽃은 꽃자루가 길어서 꽃자루 끝 씨방의 열매를 빼면 열매와 연결된 암술이 길게 빠진다. 어릴 적 아이들은 암술을 길게 빼서 귀에 걸고 귀걸이 놀이도 하고, 암술을 빼서 그림책 아이처럼 피리로 불기도 했다. 그림에는 분꽃 놀이에 푹 빠진 아이와 대조되어 데이트를 하는 남녀 한 쌍이 보이고, 그들을 놀리는 청년들의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아이는 주변의 소리나 모습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분꽃 놀이 빠져있다. 분꽃과 접시꽃을 보아하니 계절적으로 초여름인 모양이다.


넉점02.jpg 본문 펼침면

늦은 오후였던 넉 점 반의 시간은 그림에서 온데간데없고 해가 지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는 그렇게 동네를 돌고 돌아서 해가 꼴딱 지고야 돌아온다. 시간을 알려준 할아버지가 나와 아이를 구경하는 이 장면도 미소를 짓게 한다. 이상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나 놀이에 빠졌을 때와 달리 집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표정이 사뭇 달라 웃기다. 더군다나 아이의 집은 할아버지 가게 바로 코앞이지 않는가!

넉점03.jpg 본문 펼침면


분꽃을 들고 집에 들어선 아이는 당당하게 말한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이 그림책에는 1940년대 사용했던 ‘거둥’, ‘시방’과 같은 말이 그대로 사용된다. 시방은 ‘지금’이라는 뜻이며, ‘거둥’은 임금의 나들이를 말한다. 개미들이 떼 지어 다니는 모습을 거둥으로 표현한 것이 새롭다.

마지막 그림은 아이가 마루 위로 올라가고, 엄마는 아기 젖을 주며 아이를 쳐다본다. 방안에는 저녁 식사를 하는 형제들이 보이면서 시간이 넉 점 반에서 한참 지났음을 알려준다.

엄마의 표정이 어떤지 자세히 들여다보니 엄마는 아이의 표정과 닮았다. 동네 산책을 하며 개미와 잠자리를 구경하고, 분꽃을 가지고 놀던 아이의 표정과 닮지 않았는가! 어쩌면 산책을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는 엄마도 아이처럼 동네 산책을 하고 싶은 게 아닌가 짐작해 본다.


그림2.jpg 본문 펼침면


아이는 동네 산책길에는 다양한 동식물을 만난다. 그들을 세심히 관찰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때 아이의 표정은 그것들에 집중해 있는 표정임을 알 수 있다. 나 역시 산책을 좋아하고, 산책 시 여러 동식물을 관찰하는 것을 즐긴다. 그래서인지 어쩌면 산책을 할 때 나도 아이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되었다.


산책의 좋은 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렇게 자연을 관찰하고, 생명력을 보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힘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산책할 때 천천히 걷는 것을 좋아한다. 빨리 걷는 운동이 아니라 풀과 나무의 색이나 꽃을 관찰하고, 변화를 살피는 산책이 좋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동물들의 움직임을 조용히 보는 것이 즐겁다.


이 그림책은 시 자체에서 위트가 있어 좋기도 하지만 짧은 시를 가지고 풍부한 그림으로 완성시킨 것이 더욱 큰 장점이다. 읽는 동안 아이를 따라 동네를 산책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오늘 우리 집 주변에는 어떤 꽃들이 피고, 어떤 동물들이 돌아다니나 구경삼아 나가야겠다.

그림3.jpg 산책 중 만난 청둥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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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테라피]

산책을 하다 보면 여러 동물들과 뜻밖에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오리부터 시작해서, 청설모, 다람쥐, 족제비, 심지어 멧돼지까지. 여러 곤충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도 즐겁지만 피고 지는 꽃을 보는 즐거움도 크다. 녹색 계열의 색을 좋아해서 사시사철 변하는 나뭇잎을 관찰하는 것도 좋다.

동네에 걷는 산책길이 있는가?

산책길이 있다면 산책길 지도를 만들어 보자.

산책길에서 만난 나무와 풀, 어떤 꽃이 피었는지, 지는지, 그리고 어떤 동물들과 조우했는지 산책길 지도에 기록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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