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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잔 Oct 24. 2021

글쓰기는 어렵다

<글쓰기의 최전선> 혜정의 편지

나는 왜 은유 작가의 글을 읽고 부끄러워졌을까?    

“있던 일을 복기하고 감정을 들여다보고 뒤엉킨 생각과 의견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화를 덜 내는 사람이 되었다. 훌륭하게 사는 일은 어렵고 친절하게 살고 싶었던 나로선 꿈을 이뤄가는 기분이었다.”     

  난 은유라는 작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책 뒤표지를 채우는 작가의 첫 마디 “나의 좋음은 남의 좋음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가 좋았다. 누군가 내게 공공기관 블로거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을 때 “홍익인간 정신의 실천이죠. 이렇게 좋은 걸 저만 알고 있기는 아까우니까. 널리 널리 알려서 보다 많은 분들이 보고 듣고 느끼면 좋으니까. 좋은 건 1회성이 아니라 두고두고 오랫동안 지속되는 정책이 되면 좋으니까요.”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났다. 하긴 내가 ‘홍익인간 정신’으로 답변을 시작했을 때 인터뷰어는 피식 웃었고 난 부끄럼을 무릅쓰고 꿋꿋한 척 했지만.     

“감정, 상처, 고통 같은 것들에 무뎌지는 저 자신을 봅니다. 이번 기회에 상처받는 남자가 되어보겠습니다.” 보글보글 곱슬머리에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삼십대 초반의 남성이 고개를 반쯤 숙이고 말한다. 다소 비장한 듯 수줍은 듯 신파적인 자기소개에 웃음의 잔물결이 인다.     

니체를 즐겨 읽는 이라 그런가. 책 속에는 밑줄 치지 않고 지나치기에 아까운 표현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글쓰기 강좌 수업 첫날, 자기소개 시간을 묘사한 장면이 인상 깊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끝나고 좌중 사이에 가벼운 웃음이 번지는 걸 ‘웃음의 잔물결이 인다.’라니. 문득 단원 김홍도의 ‘서당’이 떠올랐다. 훈장님께 야단맞고 눈물 뚝뚝 흘리는 주인공을 보며 유일하게 뒷모습으로 웃는 아이를 기억하는지. 다른 친구들처럼 표정이 드러나지 않지만 구불구불한 옷 선만으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리기에 명작으로 꼽히리라.     

그래서 작가가 되기는 쉬워도 작가로 살기는 어렵다. 엄밀하게 말하면 작가라는 말은 명사의 꼴을 한 동사다. 작가는 행하는 자, 느끼는 자, 쓰는 자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언어로 세공하고 두루 나누면서 세상과의 접점을 넓혀가는 사람이다.   

   

주옥같은 단어와 문장에 발목을 잡혀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 누군가 말했다. 서문만 읽어도 충분하다고. 그 말에 자신을 얻어 19쪽에 이르는 서문을 읽고 또 읽었다. 작가는 세상살이라는 거대한 물살에 떠밀려가지 않고 ‘나답게’ 살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고 그 선택에 뒤따르는 ‘묘한’ 죄의식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려 애썼다고 했다. 그의 고백 덕분에 알았다. ‘나답게’와 죄의식, 그게 아이들이 자라는 내내 공공기관 블로거 일을 했던 나를 지배했던 감정이라는 걸. 워킹맘이라기엔 고정 직장과 수입이 없어 직업으로 나를 규정해야 할 때 머뭇거려야 했고 전업주부라고 하기엔 살림과 육아에 길들여지지 않고 늘 집 밖을 갈망했던 오랜 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질풍노도의 시기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나와 달리 작가는 ‘일상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다. 자기만의 언어를 갖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감동하고 감응하는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말을 한다. 마흔이 넘도록 나에게 갇혀있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직업적 글쓰기와 본래적 글쓰기의 두 트랙을 오가며 허둥지둥 달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하나로 합쳐지는 선순환 구조에 들어와 있었다. 이 모든 게 사는 일에 휘청거릴 때마다, 그리니까 거의 모든 순간 읽고 쓰고 생각하며 일어난 변화다. 동료들과 삶을 말로 풀어내고, 말을 글로 엮어보고, 글로 삶을 궁구하며 생겨난 삶의 마법이다.     


작가는 글 쓰는 동안 TV, 살림, 가족, 스마트폰에서 한 발 물러나 ‘나’와 오롯이 대면할 수 있다고, 자유기고가 3년차에 접어들었을 때는 인물 인터뷰에 설렜다고 했다. 하지만 공공 블로거 6년차에 들어선 나는 여전히 기사작성이 버겁고 힘들다. 눈 뜨고 잠들 때까지 어떤 글을 쓸까 고민하면서도 늘 마감에 쫓겨야 컴퓨터를 마주 한다. 현장 취재는 2시간 안에 마쳤는데 10여 장의 사진과 원고지 20매 내외로 풀어내기까지 꼬박 여덟아홉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 빨래와 설거지거리는 넘쳐나고 아이들은 게임과 유투브라는 유희거리에 길들여졌다. 그럼에도 나 스스로를 ‘생계형 집필 노동자’라고 소개하지 못하고 내 일을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알바’라 칭한다. 작가는 가슴 뛰는 대로 살아가면서도 굶지 않고 이름을 알리고 책을 쓰고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됐는데 난 글쓰기로 스스로 밥 벌어 먹을 자신이 없다. 진짜 ‘내 글’이 아니어서 일까.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풍경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나. 사람 풍경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귀가 얼마나 열렸는지,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내는 내 마음의 토양이 어떠한지에 따라 채집할 수 있는 말과 피워낼 수 있는 글은 얼마든지 달라진다. 위대한 사랑이 대상을 창조하듯이 좋은 인터뷰어도 인터뷰이를 아름답게 창조한다.     


그래도 내가 지나온 시간과 내가 뱉어낸 기사들을 모두 부정하고 싶진 않다. 우연히 혹은 최소한의 정보만을 갖고 달려간 곳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가치 있는 삶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인 인터뷰를 실은 나도 좋아한다. 상대방과 이야기 나누면서 삶의 자세를 다잡고 성장하는 그 매력에 올해도 블로그 기자단에 도전했다. 다만 그와 나눈 이야기를 내 충만한 감정과 달리 아름답게 표현하지 못해서 요 며칠 전에도 좌절했지만. 그래서 더더욱 나의 관점과 감정에 명확해야겠다. 직업적 글쓰기도 아니고 본래적 글쓰기도 아닌 경계성 글쓰기지만 언젠가 나아지고 노선을 정하리라 믿으며. 


오늘의 어려운 글쓰기도 끝내는 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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