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트위스트> 라나의 편지
민음사에서 출판하는 두꺼운 고전들은 애서가들에게 늘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지만 정말 이것을 읽어 내려가는 게 쉬운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해주네요. 그야말로 저의 경우 ‘고전을 고전하다’는 표현이 딱 맞지 않겠어요? <올리버 트위스트>는 우리가 독서 모임에서 읽었던 책 중 가장 두꺼운 책이었어요. 혜정 언니가 편지에서 ‘무려 700페이지’라고 표현했지만 정정하겠습니다. 장장 ‘800여 페이지’ 라고요. 성호가 이 책을 읽기 위해 현대인의 계획적인 면모를 뽐냈다면 저는 깨알같이 틈새 시간을 공략해 읽어내려고 애썼다는 것을 말해봅니다.
화창한 일요일 두 미취학 아동들을 동네 방방장에 넣어 놓고는 나는 그 방방장 앞 간이 테이블에 앉아 <올리버 트위스트>를 펼쳤더랬죠. 방방장에 고전을 펼치다니 너무 우아하지(?) 않나요?
나는 거기서 우연히 혜정 언니의 <올리버 트위스트> 리뷰가 겹치는 장면을 목격했지요. 언니가 그랬지요. "믿고 기다려주는 좋은 어른이 되어주어야겠다고요." 저는 그러한 어른을 그곳에서 만난 거 같았어요. 이 방방장은 자그마치 2006년에 열린 곳인데 올해 10월이면 문을 닫는다고 하더군요. 주인이신 할머니의 다리 건강이 편찮으셔서 문을 닫는다고 했어요. 방방장의 세월이 흐른 만큼 할머니의 나이도 먹으신 거죠. 저 역시 이 방방장이 제 어린 시절 분위기가 나는 곳이라 좋았는데 참 아쉬웠어요. 그 언젠가 아이들을 기다리며 주인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죠. 할머니는 이 방방장을 운영하며 만난 가엾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노부인이나 낸시같이 올리버가 만났던 선한 사람들의 마음은 올리버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올리버 트위스트'는 결국 은인을 만나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그렇지 않은 우리 현실의 많은 올리버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제가 <올리버 트위스트>를 붙들고 방방장을 찾은 바로 그날, 우연히 군대 입대를 앞둔듯 짧게 머리를 커트한 청년이 방방장 할머니를 찾아왔더라고요. 군대 가기 전 인사를 드리러 왔다면서요. 손자는 분명 아닌 듯했어요. 서로 긴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를 향하는 눈빛으로 뜻깊은 관계임이 느껴졌습니다. 할머니는 그 청년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가려고 할 무렵 쌈짓돈을 꺼내 손에 쥐어주려고 하셨어요. 청년은 손사래를 쳤지만 꼭 가져가라는 할머니의 간곡한 청에 그 청년은 머쓱해하며 돈을 정중히 받더군요.
키가 훌쩍 큰 청년의 모습에서 저는 올리버의 눈빛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올리버가 노부인에게 처음으로 정성 어린 친절을 받았을 때 저도 모르게 가냘픈 손으로 노부인의 손을 잡았을 때 그 눈빛은 저러했구나 싶었어요. 어린 시절,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이를 기억하며 찾아온 청년의 이야기, 인간극장에서나 볼 법한 이 아름다운 장면을 또 내 눈앞에 목격할 수 있을까 싶어 꼭꼭 눌러 기억 속에 담아두었네요.
<올리버 트위스트>는 올리버를 둘러싼 인물들, 그들의 악랄하며 부조리한 모습을 통해 영국 사회 단면을 잘 보여준 작품이라고 우리들의 지적인 성호가 잘 이야기해주었죠. 책은 좋아해도 고전이라고는 읽은 게 다섯 손가락에 꼽는 제가 좋은 문학작품, 즉 고전이 시대를 불문하는 이유를 이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으며 느낄 수 있어요. <올리버 트위스트>를 통해 담고 있는 이야기는 분명 영국 어느 한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2021년 현재를 관통하다는 점이에요. 인간이란 쉽사리 변하지 않는 탓에 말세 인간의 민낯은 지금까지 어쩌면 우리 인류가 살아질 때까지 쭈욱 이어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지만 올리버가 은인을 만나고, 그 청년이 방방 할머니를 만났듯 희망을 지닌 이가 늘 존재할 거라고 저는 희망을 걸어 봅니다.
나의 희망에 동감의 표시를 진하게 할 글벗들이여! 이만 줄입니다.
생애 딱 한 번이라도 누군가에게 방방 할머니가 되길 꿈꾸는 라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