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상대평가를 원하시나요?
대학시절 우리 학교에는 상대평가와 절대평가가 공존했다.
누구나 그랬는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 주변의 대부분 친구들은 수강신청 기간에 절대평가 과목을 듣기 위해 마우스 클릭의 속도롤 기가급으로 높이곤 했다.
시험 전날까지 일분일초 잠을 줄여봐도 B학점도 장담할 수 없는 상대평가보다는 양심 가책 느끼지 않을 정도의 노력만 있다면 A학점 보장되는 절대평가가 우리의 정신건강에 훨씬 이롭 다는걸 우리는 본능적으로 경험적으로 채득하고 있었다.
교사가 된 지금 그때의 교수님의 입장을 빙의해봐도 한 등급이라도 더 높여보겠다는 수십수백 장의 절규들을 알파벳 몇 개로 나누는 것만큼 가슴 아프고 스트레스 가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도 해 본다.
시대에 따라 학자들에 따라 학습의 동기유발이 어쩌고 성취의 효율이 어쩌고 하면서 상대평가와 절대평가는 어떤 쪽이 나은지 끝나지 않을 갑론을박을 벌이지만 내게 있어서 만큼은 교수자도 학습자도 두루두루 만족할 수 있는 절대평가가 진리이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나 조차도 30여 년 넘게 이런저런 모양의 상대적 평가들에 젖어 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을 서열화하고 등수로 매기면서 웃고 우는 비인간적인 잣대를 만들어 왔던 것 같다.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잘 나가던 어린 시절 시골에서 전학 온 녀석이 서울에 와서도 기죽지 않고 공부 참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전교 1등이 아니면 난 이번에도 실패했다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는 1등을 했던 그날도 그것이 단독이 아닌 공동일 때는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실명을 했을 때에도 내게 상실의 고통이 된 것은 시력의 부재 그 자체이기도 했지만 많은 부분은 친구들과의 상대적 위치에 대한 박탈감과 열등의식이었다.
좋은 부모님 만나서 넘치도록 유복했던 어린 시절을 누리면서도 내가 온전히 행복할 수 없었던 것은 끊임없이 머리를 채웠던 경쟁과 상대평가 때문이었다.
노는 것 좋아하고 뛰어노는 건 더 좋아하는 나였지만 그 시간마저도 제일 앞서 뛰지 못하고 제일 힘이 세지 않은 것이 온전한 즐거움을 가로막았다.
스무 살 무렵 나름 동안의 괜찮은 생김을 뽐내던 나였지만 어느 호프집 민증 검사에서 내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건 내게 있어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다.
그때쯤 만나던 여자 친구에게 조인성이나 원빈과 내가 누가 더 잘생겼냐고 물었을 때 내가 바라던 답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만족하고 인정할 수 있는 답은 단 하나였던 것이다.
난 장난으로 삐진 척했지만 이제 고백하건대 진심으로 마음을 다친 상태였다.
친목의 도모나 단결력의 확인이라는 대학생 때의 수많은 거룩한 술자리에서조차도 내게 있어 주량의 경쟁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상대평가 항목의 하나였다.
서른이 다되어가던 때 내가 결혼을 결심하지 못했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내가 가진
경제적 사회적 위치의 상대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난 살면서 복에 겨울 정도로 많은 것을 가지고 또 누리고 살고 있다.
그런데 등수를 확인하고 남들과 재어보는 시간 동안 그것들의 그 자체로서의 가치들을 망각하고 스스로 행복을 걷어찼던 것 같다.
교사가 되어서도 더 많이 버는 친구들을 바라보았고 나름 유명한 사람이 되었을 때도 더 이름 있는 누군가를
동경했다.
난 주량을 경쟁하는 폭주가 아니더라도 소주 한두 잔에 술자리가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우리 집은 친구의 그것보다 크지도 비싸지도 않지만 그건 내가 여기서 맛있는 밥을 먹고 편히 잠을 자고 때로는 즐거운 만남들을 가지는 것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난 다른 이들에 비해서 많이 느리게 가지만 그건 내게 조금 더 노력하라는 동기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다.
때로는 어떤 이들보다 앞서 달리기도 하지만 잠시 잠깐의 우쭐거리는 사치스러운 찰나의 만족일 뿐이다.
우리는 많은 것들에서 1등이 되고 전문가가 되고 싶어 하지만 '일만 시간의 법칙'조차도 그것들 모두가 가능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수만 시간 공부한 영어나 수학이 지금 우리를 전문가로 만들어 놓았던가?
그렇지만 중요한 건 그것들을 할 수 있는 내 능력의 순위가 아니라 내게 어떤 가치로 작용하는지인 것이다.
영어는 내가 필요한 만큼만 하면 된다. 번역가나 통역가만큼 못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학도 내게 주어진 계산들 해낼 정도로면 충분하다.
보통의 사람들이 뉴욕타임스를 원어로 읽지 못하는 스트레스가 웬 말이고 미적분 공식 몇 개 잊어먹은 게 무슨 치매 증상인가 말이다.
바디랭귀지라도 1주일 관광 즐거우면 되고 계산 좀 잘못해서 몇천 원 손해 본들 마음 넉넉하게 팁이라 생각하면 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지 않겠는가?
내가 일만 번 산토끼 간 씹어먹고 일만 번 두 눈 부릅떠도 시각장애인인 것처럼
당신이 1만 번 노력하고 꾸며도 연예인은 아닌 것처럼 세상에는 극복보다는 적응하고 인정하는 것이 무모한 도전과 평가로 상처 받는 것보다 나은 것들도 많다.
그리고 내 시력이 세계 60억 등이라도 당신의 외모가 톱클래스가 아니더라도 그건 상대적인 평가일 뿐 내 인생과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우리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노력과 겸손한 만족에 답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행복의 재료는 이미 충분히 준비되었고 그것을 예쁘게 완성하는 건 이제 내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상대평가로 인생을 평가하기엔 우리에게 주어진 A+의 개수가 너무 적다.
인생을 절대 평가하는 훈련을 했으면 좋겠다.
그것만 가능하다면 대학 때의 어느 후덕한 교수님의 평가처럼 우리는 모두 A+의 행복과 마주할 수 있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있는 요즘 구독과 댓글 좋아요의 개수가 뇌리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몇 개일까?" "몇 등일까"
다시 조심해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1등 작가보다 적은 사람들에게라도 울림을 주는 글쟁이가 되도록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