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다수와 소수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
어떤 사람이 사회적 약자로 여겨지는 것은 실제적 가치일 수도 있겠지만 수적 소수가 가지는 다름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장애청년들의 도전을 모터로 하는 캠프 행사에 다녀왔다.
타이틀도 모터도 장애청년들의 열정이나 개척 같은 것들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실제 참가자는 비장애청년과 장애청년들을 1:1에 가까운 비율로 구성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선발과정도 두 집단 모두 치열한 서류와 면접 과정을 통과하는 동일한 조건이었다.
그 날의 강연자 중 한 명은 동일한 프로젝트를 1년 먼저 경험한 선배 비장애인 청년이었다.
먼저 경험한 선배로서 국내에서부터 해외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스스로의 스토리를 말하고 그 과정에서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 발언 내용이 좀 신선했다.
모든 것이 장애청년들에게 맞춰진 시간들 속에서 그가 느낀 감정은 소외감이었다고 말했다.
같은 선발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모든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배치, 논의 주제마저도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포커스가 맞춰지는 동안 스스로가 느낀 감정은 소수로서의 존재에 대한 마이너의 감정이었던 듯했다.
강의 전체 주제가 스스로가 느낀 소외감의 토로는 아니어서 평소 그런 감정을 느끼고 살고 있는 소수들에 대한 공감의 계기가 되었다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긴 했지만 내겐 여러 가지 생각을 던져주는 시간이 되었다.
사람들은 다수의 위치가 되는 순간 그들이 가지는 생각과 행동들이 모두를 위하는 것이라고 집단적 착각을 하기도 하고 그것은 다수의 힘이 되고 소수에 대한 불편함으로 작용한다.
어릴 적 특수학교에 다닐 때를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친구들 사이에서 시력이 조금 남아 있는 친구는 다수의 친구들을 위해 당연히 봉사를 해야 하는 존재로 여겨지곤 했던 것 같다.
먼 곳에 가서 물건을 사 오는 것도 어딘가에 적혀있는 글씨를 읽어내는 것도 줄줄이 기차처럼 늘어선 친구들 앞에 서서 길을 찾는 것도 저시력 친구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는 아니었지만 적지 않은 경우 그런 희생은 다수에 의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는 했다.
그 친구에게도 다 말하지 못한 불편함과 소외감이 분명히 존재했겠지만 그것은 다수의 편리함과 공통된 생각들 사이에서 이따금씩의 고마움과 미안함의 표현 이상으로 작동되지 않았다.
수많은 외국인들 사이에서의 나와 반대의 입장에서 한 명의 외국인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와 입장이 그렇듯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가 가지는 심성과는 별개로 다수의 입장에 놓이는 순간을 편안하게 느끼고 의도치 않게 소수에게 소외감을 선사한다.
그것은 신체상태, 성별, 인종, 성적 가치들과는 큰 관련 없는 숫자의 대소에 관련하는 것이다.
캠프에서 강연한 청년이 느낀 것처럼 작은 사회이든 큰 조직이든 그 집단의 설계가 다수의 편리함과 욕구에 맞춰지게 되면 소수는 그가 가진 실제적 능력의 상태와는 큰 상관관계없는 불편함 혹은 약한 소속감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모든 사회에서 소수가 사회적 약자로 여겨지게 되는 원인이다.
난 사람에겐 다수가 되었을 때 가지는 본능적 이기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수결이라는 원칙을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것도 어쩌면 다수의 이기심으로 인한 일말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교묘한 포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의 회식 자리에서 통일된 메뉴를 정할 때 끝까지 스스로의 고집을 부리던 한 동료에게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낙인을 씌웠던 것처럼 다수는 집단의 생각들을 옳은 것이라고 증명하기 위해 소수에게 전체집단을 불편하게 만드는 의미를 부여하기까지 한다.
난 어떤 선진적인 조직이나 종교적 모임마저도 소수를 위해 다수가 불편한 상태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수가 용납하지도 않겠지만 효율적이지도 않다.
그러기에 다수는 소수를 위해 최대한의 배려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장애청년캠프에서의 비장애청년은 작은 시간이라도 그를 위한 프로그램을 제공받아야 했다.
어린 시절 특수학교의 저시력 친구는 그의 입장에서 아무런 미안함 없이 거절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했다.
회식자리에서 끝까지 다른 메뉴를 고집하던 동료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그의 사정을 고려하여 예외를 허용해야 했다.
그 정도의 배려는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다수에게는 아주 작은 양보이지만 약자인 소수에게는 너무도 절실한 요구였을 것이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다수가 되기도 하고 소수가 되기도 한다.
다수가 되었을 때는 누구나 편하지만 소수에 대한 작은 생각에 둔감해진다.
무의식적 다수 본능은 예기치 않은 사이에 소수에 대한 의도하지 않은 폭력이 된다.
본능을 이겨내는 것은 지속적이고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우리는 강한 의지로 항상 소수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고 스스로가 소수가 되었을 때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