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ce + Switzerland Tour
샤모니를 다시 찾기 전, 기억 속 몽블랑은 니데글, 산악기차, 너덜길, 구떼 산장, 뿌연 몽블랑 정상, 그리고 산장 한쪽 귀퉁이에 앉아 엉엉 울던 내 모습이 전부였다.
아, 구떼 산장 위쪽에 텐트 치고, 침낭에 들어앉아 유자차를 쏟았던 장면도 있다. 정상 가던 길에 있는 무인 산장에서 만난 발 젖은 독일 청년들도 있었네. 그리고 함께 오른 산 친구들(모두 연장자이지만 같이 땀 흘린 동지이기에 山 친구로 통함)의 얼굴도 하나하나 떠오른다.
몽블랑이라는 단어 하나에 묻혀 있던 기억의 타래가 한 움큼 달려 나온다. 어느 어르신이 나이 들어 몸 움직임이 여의치 않게 되면, 추억 파먹게 된다고 하셨는데, 이만하면 쌓아둔 추억 창고가 쓸만한 건가~
2007년 7월 16알, 몽블랑에 오르기 전에 보송 빙하에서 눈과 얼음에 대한 적응 훈련부터 시작했다.
지금은 사라진, 그때는 그나마 흔적이 있었던 보송 빙하에서 배낭 가득 짊어지고 온 장비들을 꺼내, 입고, 신고, 차고 걸음마를 준비했다.
얼음 경사면을 오를 때도 내려갈 때도 피켈로 얼음을 찍어 확보점을 만드는 게 중요했다. 장갑 낀 손에서 피켈을 놓칠 경우를 대비해 가느다란 슬링을 피켈의 한쪽을 묶고, 슬링의 반대쪽은 몸에 둘렀다. 설악산에서는 설사면을 굴러 떨어질 때 피켈로 정지하는 훈련을 해 본 적도 있었다.
몽블랑에서 능선 아래로 날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탈 없이 타박타박 걷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었다.
피켈을 지팡이 삼아 경사면을 오르는 것으로 모의 훈련을 마쳤다.
훈련을 끝내고서야 샤모니 시내가 눈에 들어온다.
하산길에 소담한 산장(Hut)을 만났다. 맥주를 팔았기에 더 반가웠다. 하이네켄으로 시작해서, 이내 동을 냈다. 빙하 위에 구르고 왔더니 안 그래도 말술인 양반들이 멈출 줄을 몰랐다.
하이네켄 대신 내어준 맥주가 바로 블랑 1664였다. 이때 블랑을 처음 알았다. 당시에는 한국에 수입이 되지 않았던 터라, 첫 만남에 감격했다. 너무 맛있어서.
그 이후, 여러 해 동안 블랑이 한국에 들어오길 기다렸더랬다. 그날 저녁, 마트에 장 보러 가서도 파란 병의 블랑부터 골랐다. 병 색깔마저 마음에 쏙 들었다.
다음날인 2007년 7월 17일, 우리 팀 12명은 알펜로즈에서 출발해, 샤모니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산악기차 타러 갔다.
기차 타고 니데글(Le Nid D'aigle)로 향했다. 그래도 가는 길엔 초록이 남아 있었다.
기차는 우리를 해발 2,372m의 종점 니데글에 내려놓고 터덜터덜 다시 내려갔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올라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지도상에서도 더 이상 건물이나 도로 표시를 찾을 수 없다. 진짜 산만 떨렁 남아 있다.
각자 60~80L 배낭에 의식주를 담고, 피켈과 로프 등 등반장비를 넣고 걷기 시작했다.
점점 초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너덜길이 나타나더니 피우웅 하고 낙석이 총알처럼 날아다니곤 했다. 너덜길을 지나는 내내 헬멧을 써야 했다. 눈 위를 횡단할 때는 산 위에서 돌이 날아왔고, 걸어 올라갈 때는 앞선 사람의 발부리에 차인 돌이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걷고 쉬고 또 걸었다. 떼떼 산장(Tête Rousse Hut)을 보는 순간,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하하, 착각이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해발 3,815m의 구떼 산장(Refuge du Goûter)이었다. 다시 배낭을 둘러메고 걸었다. 산에 갈 때마다 생각했더랬다. 미쳤다고, 이건 미친 짓이라고.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즈음, 구떼 산장에 도착했다.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인 7월 18일 새벽이면 정상을 향해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악천후로 등반 금지되어, 꼼짝없이 구떼에 발이 묶였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 외엔 바깥출입이 통제된 상태에서, 해발 3천8백 미터의 갇힌 공간에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지내는 건 유쾌한 일이 될 수 없었다.
몇몇 친구들은 고소 증세를 느끼기도 했고, 산장에서 주는 프랑스식 식사는 가뜩이나 입 짧은 양반들의 구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밥이 간절한 이들에게 콘과 치즈, 크림 파스타로 주어지는 식사는 고역이었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는 명제는 변치 않으나, 실천은 쉽지 않았다. 밥상 앞에 앉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형편이지만, 메뉴를 대하는 순간 실망감은 전염이 되었다.
침상에 누운 채 뱉어내는 소소한 불평들이 귀를 스쳐 지나가지 않고 가슴에 담겼더랬다. 어느 순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무너졌다. 산장 밖 한쪽 귀퉁이에서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눈치 빠른 강명님이 곁으로 다가와 토닥거려 주셨다.
큰 산에 오르는 일은 늘 변수 투성이다. 미리 가늠하고 대응방법을 찾아두곤 하지만, 즉각적인 대처도 많을 수밖에 없다. 크고 작은 일에 들끓지 않는 감정 컨트롤은 늘 숙제로 주어진다.
부실한 밥상은 배낭 속 행동식을 꺼내 먹는 것으로 대신하고, 잠을 청하거나 등반 장비를 점검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로프도 안자일렌 하기 좋은 길이로 잘라 정리했다.
구떼 산장에서의 연거푸 이틀을 자는 건 모두의 컨디션을 다운시켰다. 기력이 충만했던 전날 출발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바람도 있었으나, 정상을 향해 산장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2007년 7월 19일, 안자일렌으로 서로를 굴비 엮듯이 엮고, 이중화에 크람폰을 차고, 피켈로 눈을 꼭꼭 찍어가면서 새벽 공기를 가르며 능선을 걸었다. 가스가 자욱해, 발 디딘 위치가 어딘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앞선 이를 걷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느낌 상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느 순간 선두가 멈춰 섰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고 했다.
몽블랑 정상이었다.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12명이 모두 몽블랑 정상에 섰다.
함께 올랐으니, 이제 안전하게 함께 하산하는 일이 남았다. 오르느라 용을 쓴 이들도 있었기에, 하산길은 사고 위험이 높아졌다. 경사진 설사면을 지그재그로 내려올 때도 안자일렌은 필수였다.
서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경사면 아래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한동안 뿌연 길을 걷다가 구떼로 거의 돌아와서야 파란 하늘을 만날 수 있었다. 아, 저 길을 다녀왔구나.
구떼 산장에 도착하고 그대로 샤모니까지 하산할지, 하루 더 산장에 머무를지 잠깐 상의를 했다. 오르는 동안 많이 지친 양반들이 있기에, 구떼 산장에서 하루 더 머무르면서 기운을 차린 다음 내려가기로 했다. 안전제일!
다만, 구떼 산장에서 꼭 자야 하는 건 아니니, 산장 위쪽에 텐트를 치기로 했다.
눈 위를 반반하게 다지고, 그 위에 비닐을 깔고 텐트를 펼쳤다.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 안에 누웠다. 산장보다 훨씬 상쾌했다.
정상을 다녀온 대견함과 홀가분함 그리고 사고가 없었다는 안도감 등등 여러 감정이 뒤섞여 천천히 웃음을 되찾았다.
밤 사이 잘 잤다. 텐트를 걷고 우리네가 이 산에 머물렀던 흔적을 말끔하게 지우고, 배낭을 다시 꾸렸다.
몽블랑 식 잘 가라는 인사인가? 하늘 참 맑았다. 로프는 안자일렌을 위해 배낭에 넣지는 않았다.
너덜길에서 만난 설사면을 횡단할 때 한걸음 한걸음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떨어져서도 안되고, 설사 누군가 삐끗해 추락한다면 함께 안자일렌을 한 이들이 제동을 해서 잡아 주어야만 한다. 순간순간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산행이었다.
오를 때는 가늠이 되지 않아 마냥 멀다고만 느껴졌던 길을 내려올 땐 상대적으로 짧게 느껴졌다. 주변 풍경이 눈에 익기도 했고, 목적지가 어딘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은 언제고 순식간에 그 표정을 바꾼다. 니데글에 도착할 땐, 다시금 가스가 자욱해졌다. 그래도 기차가 오지 않거나 주변이 안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이번 산행이 꿈이었나라고 생각하게 만들기에는 절묘한 무대장치였다.
하산주는 역시나 몽블랑. 힘들고 지쳤으나, 사고 없이 무사히 몽블랑 정상을 다녀온 기념으로 시원스레 몽블랑 맥주를 마셨다.
우리는 해냈다. 알프스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 Mont Blanc을 등정했다.
I love Mont Blanc.
온 에너지를 끌어 모아 힘겹게 몽블랑 정상에 올랐더랬다.
다시 그곳에 가고 싶을까? 갈 수 있을까?
희망, 능력 그 어느 것도 자신할 수 없다.
2007년 7월 19일, 몽블랑 정상에서 찰나의 순간을 함께 한 산(山) 친구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 자리에 있었던 나 자신에게도 쓰담쓰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