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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지면 술이 익지

황매실주

by 경주씨

매실이 나온다. 아무리 뒤숭숭한 시절에도 계절은 계절의 할 일을 안다. 얼마나 위대한가.


매실이 들어간 술이 한동안 인기였다. 매화수, 매실마을도 있었지만 나는 온리 설중매를 좋아했다. 오동통한 병도 은근히 맘에 들고, 초록색 병 안에 진짜 매실 한 알이 들어있는 것도 좋았다. 설중매가 출시되고 아빠가 처음 사 오셨다. 소주만 있던 매대에 올려진 진짜 매실이 들어간 술이라니 뭔가 근사하잖아? 아빠 옆에서 한 잔씩 얻어마시는 설중매 맛은 달고 달았다. 향긋한 그 술맛이 좋았다. 얻어 마시는 한 잔 술맛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좋아라 하니 아빠도 재밌었나 보다. 그 뒤로 꽤 자주 설중매를 사 오셨다. 설중매에 한알씩 혹은 두 알씩 들어있던 매실은 그 병에 차곡차곡 쌓여 소주를 부어두기도 했다. 소주에는 미지근한 매실향이 배어있었다. 매실이 한병 가득 찰 정도가 되면 부어둔 소주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가끔 매실주를 담갔다. 매실청 담듯이 설탕에 좀 절였다 소주를 그득 부으면 되는데 이게 좀 별로더라. 설탕이 들어간 매실주는 마실 때는 달짝하니 좋은데 꼭 뒷 날 머리가 아팠다.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싶은데 그게 술을 적게 마셔도 아팠으니 설탕이 그런가 하고 넘긴다. 그런 거다.


어느 해 나무에서 오래 익힌 알 굵은 황매실을 한 박스 샀다. 거의 살구만 한 황매실이 얼마나 향기로운지 알아?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가슴 안 가득하게 향긋함이 차오르는 듯했다. 금방 물러지기 쉬운 황매실을 살살 귀하게 씻어 물기를 빼고, 술단지에 좀 과하다 싶게 매실을 빼곡하게 채우고 소주만 부었다. 부자 된 기분. 설탕 넣은 술은 백일이면 알맹이를 걸러내고 술을 뒀다 마시는데 일부러 황매실주는 그대로 뒀다. 뒷베란다에서 술이 익어가던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에서 다시 봄 잠깐잠깐 뚜껑을 열고 몇 번쯤 향을 킁킁 들이마셨다. 향이 다 날아갈까 아까운데 그 흩어지는 순간이 너무 좋아 자꾸 코를 들이밀고 익어라 익어라 익어라. 흐뭇하게 뿌듯함이 차오르는 마음이랄까. 도수 높은 담금주가 독기를 풀고 매실향을 서서히 녹여내는 동안 몇 번의 계절이 지나갔다.


아... 찻주전자에 옮겨 담아 찻잔에 마시는 매실주맛이란. 독한데 설탕기운 없이 깨끗하게 목으로 넘어간다. 화르르 타오를 것 같은 기분을 지나면 입안에 환한 꽃향기처럼 매실향이 남았다. 아이고 어쩌자고 이런 걸 다 만들어가지고 이렇게 맛있지? 하다 하다 술까지 담아마시는 술쟁이의 느낌이란 썩 훌륭하고 뿌듯한 것이었다. 그게 봄이었나 여름이었나... 계절은 잊어도 입안을 매끄럽게 채우던 그 향이 코 밑에 남실거린다.


황매실주를 나눠마신 사람과 헤어졌다.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으니 끝인 거겠지. 무슨 이야기를 더 하겠나. 거절이 거절로 온전히 자리 잡기가 쉽지 않더라.


마음을 버리는 일이 이렇게 고단했던가. 너무 오래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봄 내내, 너무 어렵고 서럽고 힘들어 몰래 가끔 울었다. 숨어서 엉엉 울다가 그리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숨만 쉬는데도 너무 지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뭐라고 하겠는가. 닿지 않는 마음을 애써 붙들고 있기에는 내가 너무 안타까웠다. 결국 낡고 지쳐 남루해질 대로 남루해진 나를 거둘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마음을 버리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한 때가 지나갔다. 우루루 바람을 타고 한 없이 가벼이 흩날리던 꽃잎이 다 스러진 다음 같다.


남은 술 한 주전자는 어쩌면 좋나. 아껴 아껴 요리할 때 가끔 약처럼 써야겠지. 더는 저렇게 독한 술을 마실 일이 없겠지. 몇 년 묵었다고 해도 40도 담금주는 그래도 꽤나 독할 테니. 시간이 익어 향만 남은 술이 쓰일 자리가 있어서 다행일까. 염장하듯 소금 쳐 깊이 넣어둔 마음은 말갛게 술에 흔들어 씻어 얇게 저민 하몽마냥 야금야금 술안주로 써야 제 격인데 나는 이제 술을 거의 안 마신다. 술자리에도 나서지 못하는 내 지난 마음들은 어디로 갈까. 글쎄 이제부터 지켜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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