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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나고 술이 남아

인삼주, 꼬냑, 꼬냑 그리고 로얄 살루트 또 뭐더라?

by 경주씨

고모는 한 집에서 오래 사셨다. 어쩌면 거의 평생이다. 할머니가 계시던 집, 아빠가 자란 집, 그리고 떠나온 집. 드디어 이사를 하셨다.


묵은 살림은 꺼내도 꺼내도 끝이 없었다. 어느 날인가는 군대에서 삽을 잃어버렸다는 아빠를 위해 할머니가 사놓으셨다는 삽도 나왔다. 할아버지가 만드신 송곳도 나오고. 보물창고처럼 줄줄이 쏟아지는 이야기들은 서둘러 갈 자리를 찾지 못하면 갈 곳이 고물상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집이 팔렸다. 평생을 내 집인 듯 살아오신 집은 당신 집이 아니다. 마냥 믿고 살았던 그 집, 혼자 남은 주인집 할머니가 정신을 놓고 병원으로 들어가자 아들이 집을 팔았다. 온 세월을 버리고 일어설 차례.


머 할라고 이래 술을 담았으까.


정리를 해도 해도 표도 안 나는데 다락마다 유리병은 다 담금주다 할 만큼 술들이 쏟아졌다. 어느 해 인삼장수가 들렀던 날 좋은 수삼을 샀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이 술이 얼마나 된 거고. 환갑에 먹어야지 했는데 그 술은 그러고도 십 년도 더 지났다. 병마다 들어찬 계피주, 매실주, 포도주 등등 그러다 버린 술도 부지기수.


술도 술도 말도 몬한다. 말라 이래 담아나쓰까.


수돗가에 등 돌리고 앉아 병에 듣 술을 부어내며 고모는 한숨을 쉬었다.

인삼주, 매실주, 그리고 딱지도 떼지 않은 발렌타인과 꼬냑과 또 꼬냑과 로얄 살루트가 내차에 실렸다. '아이고 재이~한테 이거를 맡기믄 우짜실라고???' 괜히 톤 높여 너스레를 떨자 그 장단에 맞춰 '니는 뭇다 하믄 재미없다' 하셨다. 속이 내려앉다 가루가 되었을 텐데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렇게 실려온 술이 트렁크 한가득, 술 상자가 우리 집 현관에 눌러앉았다.


인삼주 뚜껑 둘레에 코를 박고 냄새를 킁킁 맡으니 세월을 잘 버틴 향이 은은히 밀려온다. 유리병 속 말짱하게 온전한 수삼들. 향긋한 매실주와 꼬냑을 바라보다 고만 속이 상해버리고 만다. 이사를 하시면 어떻겠냐 생각만 하다 어느 해부터 한두 번 말씀을 드리긴 했었다. 전선이 약해 에어컨도 못 들어오는 단층집을 고모는 쉽게 못 떠나셨다. 그 세월을 다는 몰라도 내 나이만큼은 알 것 같아 왈칵왈칵 속이 상해도 무작정 티를 낼 수 없었다. 요새는 이런 물건 안 나온다 하며 조각이 들어간 짙은색 옻칠 밥상도 하나 업어오고, 나무 조각이 섬세한 쟁반세트며, 꽃그림이 고운 밀크글라스 면기도 셋 얻어오고. 그러다 어느 날은 '집에 이 그릇 있제? 이거는 느그 엄마랑 반 갈랐는데' 하는 눈에 익은 접시도 봤다. 삼십 년쯤은 기본인 물건들. 미처 이삿짐에 올라타지 못한 살림들이 새것인 채로 낡아 버려졌다. 당신 손으로 차마 정리할 수 없는 짐들이 그래도 남았다. 오 톤 트럭으로 한대가 넘었다.


내가 어른이 되자 결이 다른 미안함이 눈에 보이는 날들이 왔다. 언젠가 고모가 그랬다. 내 꿈은 다음 생이 있다면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서 명절에 남편 앞세우고 친정나들이 하는 거라고. 그 얘기를 듣던 순간 목이 콱 매이던 느낌이 지금도 생각난다. 그 시절 소녀가 자라 혼자 평생을 지나오셨으니 고단하기가 어디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가족의 운명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인 고모 세월이 아득해 등이 아프다.


이사를 하고 고모는 꽤 오래 앓으셨다. 이사한 고모집에 아빠랑 가서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어떻게~ 할머니가 사놓은 삽도 고모가 챙겨 왔는데 삽 한 번 보실랍니까?"

진짜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삽이 이삿짐에 따라왔다.


고모랑 서울 롯데월드타워에서 마셨던 켈리 맥주가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그 높이가 어지러워 나는 자꾸 벽으로 들러붙는데 유쾌하게 공간 다 즐기시고 느긋하게 맥주 드셨었다. 호텔 라운지 가격이라 딱 한잔씩만 마셨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드릴 수 있었던 순간이 있어 그래도 다행이겠지? 여튼 인삼주는 팔순에 드신다고 했다. 옆에 찰싹 잘 붙어있다가 향 좋은 인삼주 한 잔 얻어먹어야지. 진짜 혼날지도 모르니까 잘 지켰다가 갖다 드려야지. 그러니까 기분 좋게 야금야금 쌔벼먹게 짱짱하게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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