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누아는 사랑입니다.
태어나 제일 처음 마신 포도주는 집에서 담근 담금주였다. 애기 때 향이 너무너무 근사해서 손으로 찍어먹었다가 입이 써 난리를 친 기억이 있다. 그리고 마주앙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와인은 희미하고 멀고 먼 존재였다. 그러다 대학 입학 후에 처음 마시게 된 와인이 보졸레누보였다. 솔직히 보졸레누보는 맛있는 줄 모르겠더라. 좀 더 좋은 보졸레누보를 마셨다면 달라졌을까. 그러다 드문 드문 한 잔씩 마시는 와인이 퍽 맘에 들었다. 어쩌면 내 안에 샘솟는 약간의 허영이 불을 지폈는지도 모른다. 쓰기만 한 소주보다 와인은 대체로 향이 풍부했다. 소주보다 도수도 낮아서 가볍게 마시기도 좋았다. 무엇보다 커다란 잔에 감질나게 부어 감질나게 깔짝대며 마시는 그 느낌이 좋았다. 떫고 떫은 와인의 맛에 몸서리가 쳐지는데 일단 좀 있어 보여야하니 어? 괜찮다? 하며 한 두 모금 삼키는 날도 있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와인은 좀 별로인 와인이었을 거다.
태생적으로 배우지 못한 것들을 혼자 도장 깨기 하며 배워나가는 재미란 얼마나 대단한가! 책, 음악, 전시를 비롯해 각종 공연무대를 미치게 탐했던 건 일종의 허기였다. 먹고살기 바빴던 부모님은 문화적 소양까지 챙겨주기는 힘들었다. 크면서 곁눈질로 접하게 되는 세계를 경외심에 우러러본다. 나는 내가 하나하나 뚫어야 하는데 이걸 처음부터 공기처럼 누리고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샘이나 죽는 거다. 와... 부러워. 겉으로는 무던한 척했지만 속으로 애를 쓰며 쫓아갔다. 그 와중에 갈피와 갈피 사이의 아름다움을 알아채는 순간은 얼마나 빛나는지, 그 무수한 은유들이 한 줄로 꿰어져 나를 관통하면 세상의 비밀을 하나 얻은 것 마냥 기뻤다. 와인도 사실은 그런 맥락이었다. 와인은 포도가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종류가 있고 대표 산지별 와인이 다 다르고 값은 또 얼마나 천차만별인데 부르는 이름에 따라 또 다르고 같은 품종이라도 동네마다 다른데 또 그 동네에서 포도를 키우는 집마다 맛이 다르다니!!!
전공 덕에 어깨너머로 맛을 들였는데 이게 문화적 맥락으로도 훌륭하고 간지가 터지는데 어찌 마다할 수 있을까. 와인이 대중적으로 시장이 커질 무렵이었다. 자취방에 좋은 건 아니지만 와인 잔을 사두고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스크류 오프너도 갖춰두고 가끔 아주 가끔 소소하게 사치를 부렸다. 식탁도 없는 자취방에 밥상을 깔아놓고 마시는 와인의 맛이란 ㅋㅋㅋ 프랑스 와인의 상표를 읽을 수 있으니 어느 동네 누구 집 아버지와 아들이 만드나 보다, A.O.C 를 알고 나니 오호라 이게 그러니까 그래도 동네서 도장받은 와인이라는 거지? 매번 새로운 맛이 새록새록 매력으로 다가왔다. 거기다 스페인, 이태리, 미국, 칠레 이건 평생의 재미다!
스물몇 인생에 가장 좋은 와인을 만나건 두바이였다. 처음 유럽 여행을 다녀오며 구라파를 향한 경외감이 온몸을 휘젓는데 타이밍을 놓쳐 와인을 미처 사지 못했다. 글쎄 독일로 넘어오니 아이스바인 말고는 딱히 와인이 안보였다(학생 단체 여행용 동선은 다 거기서 거기니까). 프랑크프루트 공항에서 다시 오겠다 다짐을 하고 경유지에 두바이에 내렸다. 면세천국 두바이에 뭔들 없을까. 여태까지 배웠던 사전 지식들을 총동원해 와인 앞에 섰다. 이태리 스페인은 일단 제낀다. 잘 모르니까. 프랑스 와인인데 가만가만 이거 등급이 좀 좋은 거랬는데. 그랑 크뤼(GRAND CRU)는 너무 비싸고 프리미에 크뤼(PREMIER CRU) 한 병 정도는 살 수 있겠다. 스물몇 살이 첫 해외여행 중 면세가로 몇만 원 하는 와인을 사는 용기라니! 그 순간에 얼마나 가슴이 벅차올랐는지 아직도 기억난다. 의기양양 품에 안고 고이고이 모셔왔다. 순진해서 진짜 딱 한 병만 사 왔다. 넘어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아직도 그 상표를 기억한다니까? Bouchard pere & fils
신의 물방울이 막 국내 정발행하고 로마네꽁띠가 이름을 떨치던 그때, 내 평생 최애는 피노누아(pinot noir)로 확정됐다. 두바이에서 업어온 그 와인이 피노누아였다. 산뜻하던 첫맛에서 꽃향기가 나고 목으로 넘어가고 입안에 잔향이 어떻고 안주가 먹고 싶어지지 않을 만큼 와... 왜 와인을 미리 열어두고 공기에 닿아 열려야 한다고 하는지 거의 처음으로 느꼈다. 아깝다, 아깝다, 아깝다 술이 줄어드는 게 이렇게 애간장이 녹을 일인가 말이다. 얼마나 좋았는지 그 와인 병을 한 십 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나중 나중에 먼지 쌓인 병을 버렸지만 내 인생 가장 멋진 와인이었다. 그 뒤에 그 보다 좋은 와인도 먹어봤지만 그 처음을 어떻게 잊겠냐 말이다. 모든 처음은 그 자체로 완성이라는 그 말이 완벽하게 이해됐다. 그래 그러니까 첫사랑도 못 잊고 그렇겠지.
파리를 시작으로 여행지를 옮겨 다니며 매일 한두 잔 마신 와인과 두바이에서 사 온 피노누아는 폭풍 같은 시너지를 뽑아냈다. 아 와인에 뼈를 묻자. 어려서 배우지 못한 청국장 맛을 기숙사 살면서 개척해 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내 지적허영과 문화적 궁핍과 모든 함의를 아울러 총족시키는 힘이 있었다. 쫌쫌따리 지갑에서 몇 만 원짜리 와인을 사서 홀짝홀짝 마시고 괜찮은 와인 바도 다니고 싶었다. 와인은 어쩜 그렇게 비싼가. 마시고 즐기려면 돈이 좀 많이 들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 다 갖추지 않아도 되고 일상처럼 마시는 거야 하는 허세도 이미 장착 완료했다. 높이 올려다보던 세계를 기어이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내 집에 손님용 와인잔까지 갖춰두고 나는 흡족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와인이 그러하듯 내 삶 속에도 와인이 그러하기를 바랐다.
그러다 보니 진짜 웃긴 게 정말 일상적으로 와인이 좋아졌다. 파스타를 볶다가 요리에 넣은 와인을 쫌쫌따리 미리 마시기도 하고, 비싸지 않지만 여름날에 좋은 스파클링 와인을 일부러 사마시는 날도, 묵은지를 씻어 볶아서 좀 진한 와인이랑 먹으면 맛있다 그런 식으로. 발효식품에는 발효주지 하는 너스레도. 회사에 들어온 명절선물 중 와인은 전부 다 내꺼. 그것이야말로 진짜 개꿀.
언젠가는 루와르 강을 따라 무수히 산재한 와이너리를 도장 깨기하고 싶은 꿈, 프랑스만 있겠냐고, 이태리는? 스페인도!!! 유유자적 운전해 오후 무렵 도착한 시골 마을에 짐을 풀고 그 동네 상표가 붙은 와인을 마시고 해지는 풍경을 보다 잠들고, 일어난 아침에 동네 와이너리를 둘러보고 와인을 사고 동네 작은 레스토랑에서 그 와인을 마시는 상상 같은 거. 3박 5일짜리 출장 말고 유럽을 다시 가는 상상,
기어이 언젠가는 그러고 말겠다는 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