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약이 아니야
마음이 부대끼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잠을 잘 때가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 몰아서 잤더니 잠이 숭덩숭덩 잘려나갔을까? 잠이 안 오는 날 홀짝홀짝 한 잔씩 두 잔씩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게 아마 시작이었나 보다.
주중에 술친구가 없었다. 친구들은 다 멀리 있고 어쩔 수 있나 술은 혼자 마시는 거지. 퇴근길 마트에 들러 그날의 주종을 고르고 주종에 걸맞은 안주도 구상한다. 혼자 먹는 술이 뭐가 그렇게 거창하냐 묻겠지만 그날의 날씨 온도 습도 그런 거 중요하다. 이왕 마시는 거 맛있게 먹으면 좋잖아.
맥주가 마시고 싶은 날은 집 앞 치킨집에서 치킨을 포장하기도 하고 뭐라도 간단하게 볶음을 만들거나
소주가 땡기는 날은 대체로 비 오는 날인데 그럴 때는 칼칼하게 김치찌개도 좋고 고추장찌개도 좋다.
간혹 막걸리가 먹고 싶은 날도 있는데 그럴 때는 뭐 냉장고 반찬을 털어 먹기도 하고 조합은 무궁무진하고 심지어 어지간한 건 만들 수 있다! 다만 혼자라 흥이 덜 나는 거지.
그렇게 한잔 한잔 마시다 보면 졸렸다. 술인지 식곤증인지 모를 이유로 잠들었다 보통 새벽이면 깼다. 잠의 유효기간은 술기운이 남아있는 만큼 딱 그만큼. 그래도 그렇게 깬 새벽에 다시 술을 마시는 경우는 없었다. 그것만큼 쓸쓸한 건 또 없어서. 잠을 깨지 않을 만큼 술을 한두 잔 더 마시기 시작하자 혼자 마시는 양이 야금야금 늘어갔다. 어느 날인가 거울을 보니 부석부석하게 술살이 오른 내가 너무 미워 보였다. 이러다 알콜중독이 되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그렇다고 술을 안 마시면 아예 잠이 오지 않았다. 벌써 악순환 사이클에 접어든 뒤였다.
잠도 술도 엉망인 채로 한참을 지내면 몸이 고장 났다. 그러면 한동안 술 끊고 한약 먹고 운동도 사부작사부작하고 그렇게 조금 나아져 다시 술을 마셨다. 아 인간 징그럽고 징그럽다. 나아진 다음에 할 일이 술이야? 근데 그게 그랬다.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고 술이 유일하게 구원인 것만 같았다. 몇 년이나 그렇게 엉망진창 사이클을 반복했다. 급기야는 이제 술을 마셔도 졸리지 않았다. 아닌데. 그거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예쁠 나이를 낭비하는 게 말이 되냐 온갖 이야기들을 내가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고. 술이 아니라 우울증 치료를 했어야 했다. 그게 한참 나중에야 그런 생각에 닿았다.
술이 모든 것에 답을 줄수도 대안이 될 수도 없다. 너무 많은 의미를 술에 투영했다. 과했다.
있잖아~ 적당히만 선을 지키면 술만큼 재밌는 것도 잘 없다? 사람을 살금살금 간지럽히듯 한 겹 한 겹 그다음의 재미를 준다. 어쩜 시도, 노래도, 달빛도 층위를 더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모든 의미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순간을 훔쳐봤는데 어떻게 술을 멈추겠어. 그 아름다운 너머를 난 이미 봐버렸는데 어떻게 맹숭한 날들로 돌아가겠어. 그 맛에 홀려 야금야금 술이었는데 잠을 담보로 했더니 술에 잠식당하는 기분이었다. 시도 음악도 다 사라지고 그저 알콜에 기대 잠을 구걸했다.
아뿔싸.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어느 날 혼자 집에서 마시던 술을 멈췄다. 길고 긴 불면의 날들이 왔다.
자의로 술을 멈출 수 있으니 알콜의존증 그런 건 아닌가 봐 그치? 그런 허접한 위로를 하며 밤을 버텼다.
아 가끔 도무지 잠이 힘들어 견딜 수 없는 날 어슬렁어슬렁 새벽길을 나서 국밥 집에서 소주 반 병에 국밥 한 그릇 먹고 돌아오기도 했다. 걸음 끝에 사무치게 한 잔 간절해지는 그런 날들에만.
여러분 잠이 안 온다고 술을 마시지는 말자. 멜라토닌, 마그네슘이 안 들으면 병원을 가고 잠을 자자. 술로 얻은 잠은 얕고 얕아서 내 살을 파먹을 뿐이었어요. 거기에는 시도 노래도 끼어들 틈이 없어. 그냥 절벽 끝 막막한 어둠처럼 가라앉은 내가 웅크리고 잠을 기다릴 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