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시간을 팔고 다녔지
몸 안에 말이 들어차 도무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그러다 마음이 꼴딱꼴딱 숨이 차 고만 좀 울고 싶을 때
그런데 하필 달빛이 넘실거려 창을 밀고 들어설 때
어쩔 수 있나 술 한 잔 해야지.
술은 어쩌면 말을 풀어내는 시작
한숨 쉬고 ‘그래서 있잖아 사실은...’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게 하는 마법
그래서 쏟아진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상한 속이 좀 풀려있곤 했다.
나는 술을 사랑했나 이야기를 사랑했나
멀리 돌아가 본다.
집을 떠나 대학생이 되고 본격 술쟁이가 되었다. 어지간해선 얼굴에 표도 안 났다. 날름날름 들어가는 술은 어쩜 그렇고 달고 단가. 학교 앞 우루루 몰려 들어간 호프집부터 찌개가 나오는 가게들을 전전하며 술을 마셨다. 아주 그냥 들이부었다가 맞다. 겹치던 일상이 하나도 없는 새사람들을 잔뜩 만나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나 귀 기울였다. 그러다 어느 만큼 술이 들어가 스멀스멀 빗장이 풀리면 속에 꼭꼭 눌러둔 내 말들을 불러내기도 했다. 갓 스물을 넘긴 애기들. 나이가 많아봐야 그들의 나이도 고작 스물서넛. 불안을 바닥에 두고 선 애들이 나누는 이야기들이 눈에 잡히는 것 같다. 거기에는 허깨비 같은 약간의 철학과 스며들던 문학과 치기 어린 사회과학과 각자의 스물 남짓한 생의 무게를 견디는 노래도 있었다. 그런 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을 느릿하게 걸으면 학교 뒷산에서는 스멀스멀 안개가 내려왔다. 그래 여기 살자. 나를 발붙이게 했던 모든 것들.
마음 둘 곳이 없어 술에 마음을 두었나, 결국 술병이 났다. 3학년을 마치고 휴학했다. 쏟아지는 눈총을 견디고 운동하고 새사람이 되었고 간이 말랑해지고 그리고 다시 술을 마셨지. 어려서 가능했다. 그때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떠나기도 했고 조금 멀리 머물기도 하고 내가 떠나오기도 했다. 그리움에 이름을 붙이면 순서대로 떠오르는 얼굴들마다 옆에 앉아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던 술자리가 여지없이 있다. 술이 아니어도 마음을 나눌 방법이 여럿 있다. 그땐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새로 사람을 만나면 자연스레 술자리에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처음 만나는 날과 열 번 만나는 날의 이야기의 농도는 다르다. 그 사이사이 이야기가 보태진다. sns와 msn 메신저부터 네이트온을 지나 카톡까지 차곡차곡 이야기가 쌓인다. 키보드로 키들거리던 농담은 얼굴을 마주하고도 유효하다. 마디점프를 하듯 사이가 훅 깊어지는 일도 빈번했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술을 마신다. 그다음은 그 사람의 오늘이 궁금하고 내일을 생각한다. 갈피 갈피 스며든 이야기가 나를 빼곡하게 채운다. 마음속 허기가 사라지는 그 찰나를 호시탐탐 노렸다고 할까.
시끄럽게 게임하고 파도타기 하듯 술 마시는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조용히 앉아 노닥노닥 이야기를 안주 삼듯 혹은 이야기의 추임새처럼 술을 마셨다. 그렇게 이야기가 쌓이니 술이 좋은지 이야기가 좋은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 다른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그 순간이 못 견디게 좋았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나 문득문득 궁금한 인간은 가까워진 타인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그 현장성이 포기가 안되는 거다.
홀랑 홀랑 마셔 없애는 술 잔에 마음을 흘려 보내며 그렇게 한 때를 보냈다.
그래서 나는 술을 사랑했나 이야기를 사랑했나
귀하고 맛있는 술이 생기면 사람들을 생각했다. 얼마나 좋아할까. 얼른 만나자. 이거 나눠 먹자.
그래서 오늘은 어땠어?
나는 있잖아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