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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처럼 Feb 27. 2019

이름이 고민이지 말입니다

작명의 달인, 아빠의 눈으로 지은 모찌의 이름

내 이름 말고

     

신학기가 되면 재미삼아 거짓말을 했다. 처음 만나는 친구, 한 해 동안 친하게 지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친구에게 그랬다.


“있잖아, 나 비밀이 있어.”

“비밀? 무슨 비밀?”

“사실 나 쌍둥이야. 내가 언니고 내 동생은 다른 학교에 다녀.”

“우와! 진짜? 그럼 너희 둘이 똑같이 생겼어?”

“응, 그래서 간혹 엄마 아빠 몰래 서로 학교를 바꿔서 가기도 해. 만약에 나처럼 생겼는데 널 몰라보면 내 동생이니까 잘해줘.”

“오오 진짜 멋지다. 나도 쌍둥이였으면 좋겠어.”

“그리고 내 진짜 이름은 OOO이 아니라 김유진이야.”

“잉? 아까 선생님이 너한테 OOO이라고 불렀잖아.”

“그러니까. 학교에서는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집에서는 아니야. 너한테만 특별히 김유진으로 부를 수 있게 해줄게.”

“어, 알았어 고마워.”


혼자 자란 나는 늘 가상의 형제를 꿈꿨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쌍둥이 자매를, 중고등학교 때는 멋있는 대학생 오빠 둘을 바랬다. 나를 낳은 뒤 더 이상의 자식은 없다고 선언한 아빠 덕에 동생이 생길 여지는 없고,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마음대로 상상하고 꾸몄던 것 같다. 이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마, 내 이름은 어떻게 지었어?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이 숙제로 내줬는데 뜻도 같이 알아 오래.”

“이름? 너 낳고 얼마 안 되서 할아버지가 리스트를 가지고 오셨어. 각반 여자 반장들 이름이라고 하시더라. 쭉 훑어보니까 OO이 제일 예쁜 것 같아서 OO으로 하겠다고 했지.”

“그게 다야? 뜻은?”

“곱고 어질다.”

“뭐야, 내가 무슨 신사임당이야. 뜻이 뭐 그래. 조금 더 멋있는 뜻 없어?”

“곱고 어질다가 어때서? 여자 이름으로 얼마나 좋아.”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던 할아버지는 첫손주로 아들을 기대했다. 하지만 나는 딸이었고, 준비해놓은 이름이 없었다. 엄마조차 나를 낳는 순간까지 아들임을 확신했다고 하니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래도 성의가 없다. 나중에 내 자식이 생기면 기필코 멋있는 이름을 지어줘야지. 그리고 꼭 형제자매를 만들어줄 것이다.




이름으로 장난치지 말지 말입니다


“에...그러니까 말이다. 내가 이름을 하나 생각해봤다. 현명할 현자에 큰 덕, 현덕이 어떠냐?”


딸을 생각하고 있던 우리는 시아버님의 갑작스런 의견 개진에 당황했다. 사촌여동생이 태어났을 때 ‘봉덕’이라는 이름을 받고 몇날며칠을 울었던 고모가 생각났다. 힘겨루기에서 밀린 고모는 사촌동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에야 개명 신청을 했다. 나도 그래야하나.


“아버지, 아이 이름은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는데요. 제 아이니까 이름만은 제가 짓고 싶어요.”


멋있다. 내가 이런 남자랑 결혼을 했었지. 신랑은 학부 시절 이미 딸아이 이름을 지어 놓았다. 철학과 문학에 심취한 그가 지은 이름은 꽤 그럴싸했다. ‘은유’, 거울처럼 마음을 비춘다는 뜻이다. 열의는 있으나 아이디어가 없는 나로서는 수긍할만한 이름이었다. 어감도 예쁘고 뜻도 좋다. 그 이름을 탐내는 친구들에게서 신랑은 십년이 넘도록 그 이름을 지켜냈다. 나 또한 질 새라 친구들에게 이름을 선포했다.


출산이 아닌 입양으로 마음이 기울었을 때도 선택에는 변함이 없었다. ‘은유’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아이를 머리에 그렸다. ‘은유야’라고 부르면 하얗고 작은 쌍꺼풀이 없는 아기가 떠올랐다. 이름처럼 부드럽고 유순한 성품일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든다.


그리고 모찌를 만났다. 이미 보육원에서 불리던 이름이 있었지만 입양절차가 마무리되면 새 이름으로 개명할 예정이었다. 단둘이 데이트를 나간 오후, 몰래 불러보았다.


“은유야.”

“..........”


힘차게 발차기를 하던 모찌가 빤히 나를 쳐다봤다. 다시 한 번 불렀다.


“은유야~”


낯설다. 빨간머리 앤을 금발머리 엘리자베스라고 부르는 느낌이랄까. 다른 이름은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스러웠다. 모찌는 이렇다 할 대꾸도 없이 다시 신명나게 발차기를 시작했다. 아리송한 기분으로 보육원 밖을 나왔다. 퇴근하고 돌아온 신랑에게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여보, 있잖아. 모찌 이름말이야.”

“응, 은유로 하기로 했잖아. 왜?”

“아니 오늘 내가 모찌랑 산책 나갔다가 슬그머니 불러봤는데 조금 안 어울리는 거 아닌가 싶어.”

“그래? 하긴 우리 모찌가 은유라는 이름하고는 조금 다른 느낌이기는 하지. 그래서 모찌 만나고 떠오르는 이름이 있어?”

“희동이?”




아빠가 모찌에게 주는 첫 선물, 이름


아이와 이름의 언발란스함에 동의한 그는 작명을 시작했다. 은유라는 이름은 도저히 버릴 수 없어 모찌의 동생을 만나게 되면 그때 쓰자고 합의했다.


“생각났다, 생각났어!”

“뭔데 뭔데?”

“로라 어때? 이국적이고 좋잖아. 영어 이름을 별도로 짓지 않아도 되고.”


이름 짓는데 재주가 있다고 생각한 신랑인데, 한계가 왔나보다. 그의 성은 ‘오’씨다. ‘오’씨라는 성은 참 기묘해서 붙이는 단어마다 유쾌한 느낌을 주었다. 오란다, 오뎅탕, 오렌지, 오랏차차, 오마니, 오레오, 오랜만, 오소리, 오미자.... 몇 주간 신랑의 머리에서 나온 이름은 이랬다. 아무래도 너무 오랜 기간 ‘은유’라는 이름에 정을 준 것 같다.


‘방시리’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방실방실 잘 웃길래 그런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놀림을 받을 때마다 부모님이 자신의 인생을 가지고 장난친 거라며 속상해 했다. 이대로라면 남 일이 아니다. 우리 모찌가 이름 때문에 우리를 원망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뭔가 신비로우면서도 중성적이고, 성차별적이지 않으면서도 여성스럽고, 모찌와도 찰떡처럼 어울리는데 뜻까지 멋진 뭐 그런 이름 없을까?”

“그게 오로라인데?”

“고마해라.”


보다못한 나도 작명에 뛰어들었다. 조금씩 듣기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자 그의 눈빛에서 조바심이 느껴졌다.


“왜? 내가 좋은 이름들 지으니까 불안해?”

“어. 그래도 조금만 시간을 더 주면 안 돼? 모찌 오기 전까지만 지으면 되잖아. 진짜 잘 지어보고 싶어서 그래.”


그렇게 소원하는데 못 들어줄 이유가 없다. 딸아이를 상상하며 은유라는 이름을 지어 놓은 지 20년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딸이 생기기를 고대했는데, 이름 짓는 기쁨이 온전히 남편의 것이었으면 싶었다. 기다려보자.


몇 주간을 끙끙 앓던 신랑이 작은 탁자 위에 수첩을 올려놓았다. 가족이 늘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둘이 여행을 하자며 오른 비행기 안이었다. 수첩 위에는 시원시원하고 뾰족하게 갈겨 쓴 글자가 적혀 있었다.


“뭐야. 나 한자 잘 모른다니까. 뭐라고 쓴 거야?”

“대학 나온 거 맞아? 하아 진짜 어떨 때 보면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그러니까 뭐라고 적은거야? 모찌 이름이야?”

“응, 햇빛O 눈O. 햇빛처럼 따뜻한 시선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야. 모찌를 처음 만났을 때 그 눈에 반했거든. 반짝반짝 기억나지?”


신랑의 얼굴에 뿌듯함이 뿜어져 나왔다. OO이, 오OO. 작은 목소리로 읽어 보았다.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정도만 표현하면 안 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안다.


“소오름. 왜 이렇게 이름을 잘 지어? 뜻도 너무너무 좋고, 무엇보다 모찌에게 정말 잘 어울린다. 들었을 때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잘 모르게 중성적이고. 어감도 부드럽고, 무엇보다 웃기지도 않고, 역시 당신은 작명의 달인이야. 오오 오카피!”


조그만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동그란 구름 위로 이름을 떠올렸다. 오OO. 내 딸의 이름. 겹겹이 둘러선 구름 사이로 햇살이 보인다. 언젠가 텔레토비에서 보았던 아기 햇님 같다. 햇님의 얼굴에 모찌의 얼굴을 넣어 보았다. 눈가에 장난기가 가득한 모찌가 ‘아하하하하’하고 웃는다. 찰떡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찾던 ‘은유’를 내려놓고, 우리에게 찾아온 모찌에게 어울리는 새 이름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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