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은 대개 달래주어야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울어야만 달래지는 것들이 있다.
결혼식 날 딸을 바라보던 엄마아빠의 얼굴이 떠올랐을 때 차오르는 애틋함이라든지,
직장에서 말도 안되는 꼬라지를 부리는 상사에게 한 마디 대꾸조차 못하고 퇴근한 날의 분함이라든지,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소중한 이를 영영 떠나보내고 일상을 살아내야할 때 불현듯 치미는 서글픔이라든지,
오늘보다 나을 것이 없는 내일을 예상하며 누운 잠자리에서 부닥치는 아득함이라든지,
그런 것들.
그 뿐이랴.
매사가 따분하게 느껴지고 의욕이 없는 날들이 이어질 때야말로 울음이 필요한 때다.
현실이라는 흙으로 메워두었던 눈물샘에서 억지로라도 몇방울 길어올려 얼굴을 적시고 나면 곧 웃음마저 피울 힘이 생긴다.
그러할 때 우는 일은 시들어가는 숲에 비를 뿌리는 것과 같다.
雨는 일이라고, 말장난같지만 스스로 무릎을 치며 의미를 부여해본다.
막상 울음이 필요한 순간에는 도리어 눈물을 피하고만 싶어지기도 한다.
울기 위해서는 그 감정에 푹 빠져들어야하는데, 그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심연은 나조차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없기에 눈물과 함께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혹여 깊숙한 곳에서 터져나온 것들이 나와 내 일상과 내 주변을 휩쓸어버릴까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마냥 모르는 척해서만은 어떤 것도 결코 해소될 수 없다.
그 애틋함, 분함, 서글픔, 우울함을 똑바로 보고 포효해야 한다.
소리없이 흘리는 눈물로도 달래질 때가 있겠지만, 울음소리가 클수록 맞이하는 해방감은 커진다.
샤워도 좋지만 목욕 후의 개운함을 따라올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할까.
결국은 살아내기위해 쏟아내야하는 울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기위해 쏟아내야만 하는 울음들이다.
달래주어야하는 울음도, 마음을 달래주는 울음도 모두가 생명을 밝히는 일임을 되새겨본다.
울고싶을 때 울지못하는 무거운 어깨에 심심한 위로를,
울어야할 때 울 줄 아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