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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여여 Jul 29. 2021

6화 우물 있는 집에 살게 되다.

마을, 동네 그리고 한 집의 역사


생일지나 주민등록증이 발급됐다. 그게 뭐라고 이제 내가 한걸음 더 어른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그렇게 술 먹을 때나 쓸 줄 알았던 민증을 처음 써먹을 일이 생겼다. 남해의 집으로 주소 이전을 한것이다. 처음 면사무소를 방문해 직접 주소 이전을 작성하고 민증 뒤 주소 스티커를 붙였다. 공식적으로 남해의 군민이 된 순간. 이전까지만 해도 늘 당연하던 것이 이제는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닌 느낌이었다. 오래 살아온 고향을 떠나 남해군민이 되니 남해는 어떤 곳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우물이 있는 집

집 앞엔 넓은 태백산맥 끝자락의 산이 펼쳐진다. 마을 중턱 꼭대기 집, 이 집은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꽤 오래 할머니 한분께서 혼자 사셨으며 얼핏 듣기론 이 마을에서 중요한 큰집이었다고 한다.


이 집엔 신기한 역사들이 집안 곳곳 숨겨져있다. 집 옆에 자리한 우물은 할머니가 평생을 사신 동안 마르지 않고 아직도 이 마을의 생명수 같은 역할을 한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해 모든 생명들에게 안식처가 되어준다. 옛날엔 지금의 집 터도 모두 바다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마을이 내려온 거라고 한다. 그래도 아랫동네에 비해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해 마을에 물난리 등 일이 터지면 모두 이 집에 모였다고 한다.

유자나무에 유자 가득한 모습

집 뒤로는 유자나무들이 빼곡하며 대한민국 첫 유자 씨는 중국에서 넘어와 바로 남해군 이 지역에 심어졌다고 한다. 한 시조 유자나무는 아직도 한동네에 살아있다. 그 유자나무에서 받은 유자 씨를 장독에 넣어 씨앗을 발아시켰다. 그 묘목을 심었더니 그 유자나무의 새끼들이 점점 번져나갔다. 그중 몇몇이 우리 집의 유자나무가 되었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 집 유자를 직접 심으신 한 할아버지의 말씀이시다.


아랫집 순이 할아버지, 할머니, 전 주인 할머니... 지금껏 아파트에 살다 '마을'에 살게 되면서 이웃주민을 모를 수가 없게 되었다. 아랫집 할아버지는 핸드폰 조작법을 물으러 날 찾으시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해서 가져다 드리기도 한다. 할머니의 두릅을 사기도 하며 우리는 자연스레 서로 챙기고 챙기는 사이가 되었다. 날 만나면 걱정과 덕담은 물론이다. 나는 가끔 우리 집에 없는 야채가 먹고 싶을 때 할머니가 좋아하실만한 생필품을 챙겨 들고 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 문을 두드렸다. 근황 이야기하며 말동무가 되어드리면 집에 오는 양 손은 한가득 맛있는 걸로 가득하다.


잠시 전주인 할머니 이야기를 하자면, 할머니께선 시집오셔서 한평생 남해의 이 마을에서 사셨다. 50년 아니 60년 이상을 말이다. 그 정도면 강산이 몇 번이나 봐꼈을까. 할머니께선 이 지역에 대해 모르는 게 없으시다. 언제 뭘 심어야 하는지, 뭐가 잘 자라는지, 여기는 뭐가 있는지, 누구네 집의 소식들까지도 모조리 다. 알고 계신다. 마을을 지나다 할머니께 인사하곤 하는데 늘 "아이고~ 왔나" 하시며 정겨운 표정으로 반겨주신다. 그 나이에 아직도 어쩜 그리 정정하신지. 할머니의 밭에는 늘 작물이. 정원에는 먹거리와 꽃으로 가득하다.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려운 일도 손쉽게 해결하시며 늘 자신감이 넘쳐흐르신다. 이 마을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가는 힘이 아닐까. 몸과 나이를 떠나 그 힘이 어찌나 대단하던지. 젊은 나는 늘 감탄만 한다.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마치 역사책을 보는 듯하다. 이곳에선 또래들과 시답지 않은 농담을 떨진 못하지만 어쩌면 내가 평생 살며 듣지 못할 이야기들을 듣고 있다. 어느새 내 입에선 요즘 유행어가 아니라 할머니들의 말투가 묻어 나오기도 한다.


이 마을, 동네, 한 집의 역사들... 평생을 그냥 살아내고 있는 이 분들은 모를지라도 이방인의 눈에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오늘도 고무신 신고 터벅터벅 노래 흥얼거리시며 집을 향해 걷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내 눈엔 아름답게 비친다. 그저 한 사람 박물관이 언제 문 닫을지 모르니 기록하고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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