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게 요리하는 법을 익히다.
어릴 적부터 엄마는 “밥 안 먹을 거면 학교도 가지 마!”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런 엄마의 마음 덕분인지 아침을 거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밥 먹을 시간이 없으면 학교 가서 먹으라고 도시락을 싸주셨고, 이제는 아침에 뭔가 먹지 않는 것이 좀 더 이상하다. 입은 짧은 나이지만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처럼 꼬박꼬박 밥은 잘 챙겨 먹었다. 친척들과 모여서도 늘 맛있고 신선한 음식을 함께 나눠먹으며 놀았고, 맛있는 음식만 있다면 엄마와 함께 맛 기행 여행을 하기도 했다.
어릴 땐 잘 몰랐지만 남해에 살며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맛'에 대한 감각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집 앞에 텃밭이 있으니, 그 텃밭에서 바로 먹는 야채의 신선함은 내 기억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아침 당번이기도 했는데 아침엔 자다 일어나서인지 모두 입맛이 없다. 자극적인 것도 할 수 없고, 그저 심심하며 속 편한 음식, 하지만 입맛은 당기는 음식 위주로 준비해야 했다. 전날 밤엔 늘 내일 아침 메뉴를 고민했다. 텃밭에서 난 수확물이 있는지, 없다면 무엇을 할지, 다른 이들은 뭘 먹고 사는지, 나는 무얼 먹고 싶은지.
그렇기에 더 자주 텃밭과 주방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이 집의 주방장이시기도 한 숙모에게 묻고 보조하며 내 눈과 혀, 손으로 요리하는 법을 익혔다. 숙모의 음식 솜씨는 꽤 뛰어나셨다. 음식에도 스타일이 있는데 숙모는 참 정갈하고 깔끔한 편이셨다. 어릴 적엔 삼촌네 가서 먹던 김칫국이 참 맛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다. 깻잎과 얇게 슬라이스 한 양파를 켜켜이 쌓아주는 것이 포인트인 "깻잎찜", 향긋한 깻잎과 부추가 많이 들어간 "돼지국밥", 고추가 한아름씩 열릴 때면 담가 두는 "고추장아찌", 마늘이 맛있을 때는 고추장에 푹 담근 "마늘장아찌" 등 덕분에 떠올릴 수 있는 음식들이 참 많아졌다.
추억을 하나 더 꺼내자면 여름엔 토마토와 여름 야채가 무럭무럭 자라, 온 가족이 반기는 음식 중 하나인 비빔국수를 먹는다. 국수를 한입 가득 먹어야 맛있다는 숙모께선 국수를 정말 양껏 하신다. 토마토, 상추, 부추, 각종 채소, 거기에 양파를 얇게 슬라이스하고 고추장과 직접 담근 효소, 감식초로 양념장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고소한 깨를 빻아 화룡점정으로 올려주면, "여름 야채 비빔국수" 완성이다. 한참 바깥일 하고 들어와 먹는 이 국수의 맛은 정말 내 인생 국수다. 채소의 극도의 신선함과 고소함은 잊기 힘든 맛이다. 그 계절마다 그 계절의 향기를 풍기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기쁨이다.
이런 음식을 먹기까지 나의 노동으로 식재료를 기르고 요리를 하고 식구들과 함께 나눠먹는다. 오랫동안 숙모의 보조를 하면서 음식은 결국 자연이 다하고 마무리는 정성인 것 같다. 내가 어떤 마음을 담을 것인지에 따라 완성된 요리는 티가 난다. 가족을 위한 마음, 조금이라도 좋은 재료로 가족들이 건강하고 맛있게 먹었으면 하는 마음, 이런 마음들이 담겨 한 상이 차려지는 것이다. 그다음엔 그 한상에 모인 온 가족들이 숟가락 하나 놓고 그릇을 옮기고 눈치껏, 알아서... 물 한잔 챙기고 어른의 숟가락 들기를 기다리고, 함께 먹길 기다리고 너무 먹고 싶은 저 남은 반찬을 '먹어도 될까?' 하는 마음을 한번 들여다 보고, 좋은 이야기, 싫은 이야기, 가끔 혼나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이 밥상에서 우리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배운다.
식탁에서의 좋은 경험은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이 소통은 곧 연결되어 나를 요리하는 삶으로 이끈다. 가족의 소통도 곧 이 밥상에서부터이며 농사를 짓는 일도, 요리를 하는 일도 결국 그 땅, 식재료와 소통하는 일이기에. 이로부터 함께 살아가는 법을 공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