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수영 일기 04화

동네 수영장의 풍경

평균 연령 57.5세의 온기

by Ronald
"아이고! 오리발을 두고 왔네!!!"


탈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뒤쪽에서 한탄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고 있던 나도 속으로 어이구, 큰일이네 싶었다. 얼마 전 단체 카톡방에서 오늘 오리발을 두고 왔다며 슬퍼하던 친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오리발이 없어도 수영은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어차피 오리발은 옵션이잖아라는 내 말에 친구(회사원, 수영 경력 2년 차)는 대답했다. 오리발 강습 날, 자기 혼자 오리발이 없으면 뒤쳐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된다고. 그렇다, 부스터인 오리발이 없으면 속도가 안 나는 건 당연지사. 결국 친구는 그날 오리발 강습 대신 자유수영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동네 수영장에서 오리발을 두고 온 건 작은 일이 아니라 큰일인 것이다. 탈의실에 들어서자마자 깜빡한 자신을 자책할 만큼.


샤워실

샤워실에 들어서자 저쪽에서 토닥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괜찮아, 언니. 결석한 사람들 있어서 남는 거 있을 거야. 그거 쓰면 돼지." 아까 그 할머니와 같은 반 친구인가 보다. 과연 할머니는 오늘 무사히 오리발 강습을 받을 수 있을까? 샤워기 앞에 서서 비누칠 한 손으로 슥슥 거울을 닦고 머리를 묶은 뒤 수모를 쓰려는데 그날따라 자꾸 수모가 머리를 빠져나갔다. 몇 차례의 실패를 지켜보던 옆자리 아주머니가 안타까웠는지 수모에 물을 받았다가 쓰면 한결 수월해진다며 팁을 주셨고 나는 마치 레스토랑의 아르바이트생이라도 된 것처럼 팁을 넙죽 받아 단정히 수모를 쓴 채 샤워실을 나섰다.


실내 수영장

수영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락스 냄새가 훅 하고 인사를 건넨다. 한쪽에선 물을 끼얹으며 들어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과 물속에선 이미 워밍업을 마치고 레인을 가르는 이들로 수영장은 오늘도 분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 동네 수영장은 크게 수심 1.2M의 6 레인으로 구성된 성인풀과 수심 0.8M, 2 레인의 어린이풀로 나뉘어 있다. 전자는 중상급반 후자는 내가 속한 초급반의 강습이 진행된다.


성인 풀의 풍경은 대략 이러하다. 레인 중앙에는 멋들어지게 다이빙으로 입수하는 상급반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 옆으로는 마치 경쟁하듯 오리발을 낀 채 세차게 물살을 가르는 접영반이 떡 버티고 서있다. 아까 그 할머니는 아마 저 반일 테다. 그 옆 레인에는 왠지 모르게 '물개반'이라고 써진 노란 수모를 쓴 사람들이 유독 많이 보인다. 물개반이라고 써진 글자 밑에는 당연히 귀여운 물개가 그려져 있다. 이 신기한 광경을 처음 목격하게 된 날, 내 머릿속에선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다. 추측 1. 같은 날 수영을 시작한 친구들이 초보 딱지를 떼고 중급에 다다르자 기념으로 다 같이 수모를 맞췄다. 추측 2. 우연히 같은 시기에 수업을 듣게 된 사람들이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친해지게 되었고 방과 후 모임 등을 통해 친목을 다진 후 같은 수모를 맞추게 되었다. 추측 3. 이 구역의 물개를 꿈꾸며 물개반 수모를 구입한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나 어느새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다. 물론 정답은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1번과 6번, 그러니까 양끝 레인은 수영장 벽에 딱 붙어있는 이른바 다슬기 파의 주 활동 영역이다. 그들이 다슬기를 자처한 까닭은 다양하다. 숨이 차서, 잠깐 쉬려고, 다리에 쥐가 나서, 몸 좀 풀려고 등등. 쉬는 시간에는 다슬기파 40%, 수영하는 사람 60% 정도의 비중을 보이는데 그래도 수업이 시작되면 인간 다슬기의 비중은 확연하게 줄어든다. 그러니깐 수영장에는 언제나 두 종류의 부류가 존재한다. 수영하는 사람 혹은 인간 다슬기.


어린이 풀에도 나름의 등급이 존재한다. 자유형/배영을 배우는 완전 초급반과 월초에는 배영으로 시작해 월말에는 평영으로 마무리하는 초중급반으로 나뉜다. 어린이 풀엔 실전은커녕 이론에 대한 지식조차 전무한 왕초보들이 대부분이라 수업 도중 수강생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강사에게 이른바 테크닉을 전수받는 풍경이 자주 목격된다. 눈이 초롱초롱한 사람도 있고 낯선 기술에 벌써부터 두려움이 생겨 동공이 흔들리는 수강생도 있다. 대략적인 설명을 마치면 보통 맨 앞에 있는 사람이 강사의 도움을 받아 시범을 보인다. 다들 방금 설명한 게 저 동작이었나? 싶을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하거나 방법을 잘 몰라 물을 먹기 일쑤다. 미안하게도 주로 물을 먹고 괴로워하는 동료를 보며 대충 감을 잡게 된다. 저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라고. 옆에서 보고 있던 아주머니가 "아... 웃으면 안 되는데 자꾸 웃음이 나오네"라며 웃음을 꾹 참는 게 눈에 보인다. 그러게요, 라며 속으로 나도 울고 웃는다. '웃지 말자. 웃지 말아야지.'라고 입술을 꼭 깨물며.


다시 샤워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샤워실로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수업은 끝났지만 셔틀버스에 올라타기 전까지 내 수영 시간은 아직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수영장을 빠져나가는 사람과 들어오는 사람이 더해지는 시간에 샤워실은 그야말로 전쟁터 같은 모습을 한다. 이렇게 샤워기가 많은데 왜 내가 사용할 샤워기는 없는 걸까라며 종종걸음으로 꽉 찬 주차장을 돌 듯 샤워실을 한 바퀴, 그리고 두 바퀴 도는 와중에 어떤 할머니가 내 손목을 꼭 잡아 샤워기 앞으로 나를 데려다 놓으신다. 본인은 샤워를 마쳤으니 이 자리를 쓰라는 무언의 제스처다. 조급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따수워지는 순간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평균 연령 (추정) 57.5세의 수영인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다. 그곳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건 주로 대차게 물을 먹는 같은 반 동료들의 몫이며 정체불명의 물개반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매시간 실내 수영장 벽에 붙어있는 인간 다슬기 떼를 구경하는 건 덤이며 모르는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바로 샤워기를 차지하게 되는, 운수 좋은 날도 있다. 동네 수영장에는 예상치 못한 다채로운 풍경이 있고 그곳에는 따스한 온기가 스며있다. 오리발을 두고 온 할머니는 아마 무사히 강습을 마치셨을 것이다. 이런 곳이라면 어쩌면 오리발을 두고 온 것쯤은 큰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Ancon beach, Trinidad, Cu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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