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이 알려줄 거야

어쩌면 착각일지도

by 백순댕

때론 너무 일찍 솟아난 열정이 있다.

적절한 환경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았는데 무모하게 솟아난 열정은 혹독한 시련에 꽃망울을 터뜨려 보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혹자는 노력이 부족한 사람의 변명이라고 말한다. 다른 이는 처음부터 네 길이 아니었다 조언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적절한 타이밍이 맞는 운 때가 올 거라고 위로하기도 한다. 인생은 앞만 보고 가야 한다는데 가끔씩 밀려오는 후회와 아쉬움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12월의 목련

작년 12월, 우연히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있는 목련 나무에 꽃봉오리가 돋아난 것을 보았다. 조금 따뜻해졌다고 봄인 줄 착각하고 고개를 쏙 내밀다니! 그런 목련이 바보 같아 보였다. 조급하고 성급해 보였다. 이제 곧 한파가 몰아닥칠 텐데 어쩌자고 봉오리를 피운 걸까? 소나무처럼 푸르른 잎으로 겨울을 꼿꼿하게 견딜 것도 아니면서 벚꽃처럼 눈치껏 완연한 4월에 피던가. 너무 일찍 피어버린 탓에 돌아오는 봄에는 목련이 피지 못하면 어떡하나 지금껏 피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던 목련이 새삼스레 걱정이 되었다.


사람들은 목련이 피면 봄이 와서 좋다고 말하다가도 금세 바닥에 떨어져 짓밟힌 목련 꽃잎을 보며 거리를 지저분하게 만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목련이 가엾어 보였다. 이른 봄 가장 먼저 피는 꽃 타이틀은 매화가 가져 가질 않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봄꽃은 벚꽃이 차지하질 않나. 매실, 살구, 복숭아, 앵두와 같은 맛난 과실도 열리지 않으니 봄꽃 중에 가장 큰 꽃을 피워내면서도 관심도는 한껏 뒤처진 것처럼 느껴졌다.


꽃봉오리가 아닌 겨울눈

다행히 3월이 되자 목련나무는 다시 꽃봉오리를 돋아냈다. 아니, 돋아냈다고 생각했다. 12월부터 쭉 나뭇가지에 걸려있던 것도 모르고! 꽃봉오리라 착각했던 가지 끝에 돋아난 솜털 붓처럼 생긴 것은 겨울눈이라는 것이었다. 꽃이 시들고 잎까지 떨군 목련 나무는 겨울눈을 달아 추위를 견딘다. 봄이 되면 두터운 털옷을 벗어던지고 원피스 같은 꽃잎을 한껏 뽐낸다고 한다. 목련에 대해 더 찾아보니 무려 9,500만 년 전 공룡이 존재하고 있던 백악기 시절이 나온다. 초록 잎들만 있던 세상에 흰색의 꽃이 최초로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목련이라는 것이다. 벌과 나비가 존재하기도 전이었다.


이쯤 되면 목련을 가엾게 여긴 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목련은 하나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봄이 왔다 착각하지도 않았다. 봄에 제일 먼저 피려고 욕심내지도 않았다. 몇 만년 전부터 자신의 속도로 겨울을 나고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나의 작은 세상에서 좁디좁은 시선으로 목련을 바라보았다. 키가 커서 하늘을 향해 한껏 올려다봐야 하는 목련을 나의 눈높이에 맞춰서 생각했다. 나의 불안을 목련에 투영하고 있었음을 인정한다.


어쩌면 착각일지도

겨울눈을 몰랐던 나는 그것을 꽃봉오리로 보았다. 오직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꽃봉오리었을 뿐이므로. 그리곤 당연히 한파를 맞이하곤 떨어졌을 거라 생각했다. 올해 2월 말에 큰 눈이 내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겨울눈이 돋아나 있었을까? 매일 지나다니는 길에 목련 나무가 있었음에도 도무지 기억나질 않는다. 눈뜬장님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건가 싶을 정도다.


목련이 알려준다. 어쩌면 내가 뒤돌아 보며 후회하고 있는 것들은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앞서 걱정하는 것들은 나의 망상일지도 모른다고.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오만함에서 발생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아쉬워하지도, 안타까워하지도, 불안해하지도 말라고.


겨울눈은 여러 겹의 껍질로 싸여 있어서 찬바람에 마르고 얇아지며 한 겹씩 벗겨진 후에야 비로소 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내 곁을 지나갔던 기회들을 꽃봉오리가 아닌 겨울눈의 껍질들이라 생각하자.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봄이 오길 기다리면 자연스럽게 꽃은 활짝 필 것이다. 목련이 내게 말했다.



꽃봉오리라 착각했던 겨울눈. (2024년 촬영)

keyword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