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움직인 게임 1편] 이드소프트웨어 둠
1993년 12월 10일 12시. 장장 38시간의 테스트를 끝낸 게임 하나가 인터넷으로 배포를 준비하고 있었다. 위스콘신 대학 파크사이드 캠퍼스의 전산망을 통해 배포될 이 게임은 ‘폭력’이라는 키워드 하나로 세상을 움직인 이드소프트웨어(id software)의 ‘둠’(DOOM)이었다.
1년 같은 30분이 지났고 업로드가 완료된 후 이드소프트웨어의 개발자들은 비로소 퇴근할 수 있었다. 그 후 위스콘신 대학교 전산망에 무려 1만 명의 유저가 몰려들어 전산망 전체가 다운되는 일이 벌어졌고 이 일은 월드 와이드 웹이 탄생한 이래 게임 서버 다운이 발생한 첫 사례가 됐다.
하지만 정작 둠이 유명세를 탄 건 서버 다운이 아니었다. 이 게임이 가진 과도한 ‘폭력성’은 게임의 화제는 물론 게임의 등급, 심의가 필요하다는 정치권의 목소리까지 꺼내며 수많은 논쟁을 야기했다. 이로 인해 1994년 ESRB가 개설됐고 현재까지 게임 심의 규정을 이어오고 있다.
세상을 움직인 게임 둠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1992년 1인칭 슈팅 게임(FPS)의 시초이자 첫 장르 히트작인 ‘울펜슈타인 3D’이 개발되고 있을 때다. 당시 수준을 만족하지 못한 존 카멕은 전보다 더 빠른 렌더링과 고저차 표현, 모든 곳에 3D 텍스쳐 매팅 적용이 가능한 새로운 테크 엔진 개발에 들어갔다.
이후 1992년 5월 울펜슈타인 3D가 출시됐고 새로운 방식의 게임은 마니아 층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됐다. 이 게임의 FPS 장르의 기틀을 마련하고 시장 내에서 기대 이상의 평가를 받고 있을 때도 존 카멕은 더 나은 엔진을 개발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다.
1992년 9월 그전과는 다른 새로운 엔진이 나왔고 이드소프트웨어의 개발자들은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갔다. 초기 콘셉트는 영화 ‘에일리언’ 시리즈였다. 하지만 존 카멕은 영화사와 판권을 협의할 경우 자신들이 원하는 게임 개발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해 계약 직전 포기한다.
대신 에일리언을 지옥에서 온 악마로 대처하고 영화 ‘이블데드’ 시리즈의 특징을 결합한 게임을 내놓자는 아이디어가 등장한다. 아이디어를 적극 반영한 존 카멕은 또 다른 영화 ‘컬러 오브 머니’의 대사를 인용해 둠이라는 제목을 팀에게 전하고 개발은 속도를 띄게 된다.
기획 방향이 맞지 않아 울펜슈타인 3D의 메인 디자이너였던 톰 홀은 93년 7월 퇴사한다. 이를 채운 인물은 당시 37세의 게임 디자이너 샌디 피터슨이다. 그는 출시까지 10주밖에 남기지 않았지만 톰 홀의 빈자리를 채웠다. 그는 11개의 신규 맵과 미완성 8개 맵을 완성 했다.
그리고 둠의 리드 아티스트였던 에이드리언 카멕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어둡고 잔혹한 표현을 게임 내 반영했다. 그는 실제로 병원에서 근무하며 여러 형태의 사체를 봤으며, 오컬트 문화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의 노력은 둠이 외관적인 모습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재미있는 점은 이 게임이 내부 개발자들 사이에선 ‘너무 잔혹하다’는 이유로 여러 개의 데드 신을 제외시켰다는 점이다. 둠 가이의 목이 잘리거나 허리가 잘려 상체가 날아가는 신 등이 있었지만 출시 전 과도한 표현이라고 삭제됐다.
이렇게 1993년 12월 완성된 둠은 위스콘신 대학 전산망을 통해 기다리던 고객들에게 배포됐다. 둠 출시 직후 월드 와이드 웹은 떠들썩했다. 대학교와 회사 등 전산망을 갖춘 곳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당연히 멀티 플레이의 트래픽도 쏟아지며 사내 회사 등이 멈추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오죽하면 대학교와 회사에는 둠을 실행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나왔고 몇몇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제작한 둠 삭제 프로그램이 전산 관리자에게 전달되기도 하는 등 또 다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후 소매점을 통해 출시를 확장한 둠 시리즈는 미국 내에서만 200만 장 이상 팔렸다. 이는 1995년 기준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95’보다 더 많은 PC에 설치됐다는 뜻이다.
둠이 화제를 모은 건 무엇보다 폭력성에 있었다. 당시 게임들은 일종의 ‘제한’이 풀린 형태로 확장되는 시기였다. 논란의 모탈컴뱃(1992년 10월 8일 출시)부터 스플레터 하우스(1988년 작) 각종 폭력성을 지닌 아케이드 게임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중에서 단연 둠은 최고 수준의 잔혹성을 보여줬다.
둠의 리드 아티스트였던 에이드리언 카멕은 자신이 병원에서 아르바이트 한 경험과 오컬트에 대한 관심을 더해 악마가 출현한 세계를 어둡고 잔혹하게 표현했다. 특히 존 카멕이 만든 테크 엔진은 타 게임보다 더 사실적인 폭력성을 표현할 수 있었고 이를 고스란히 유저들에게 전달됐다.
당시 둠이 출시되던 시점에는 각종 폭력성 게임 때문에 미국 의회에서 청문회가 벌어지던 시기였다. 둠은 매일 뉴스에 이름을 올렸고 많은 정치인과 학회, 단체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지금이라면 협회 등을 통해 반발 및 규제, 자제 등의 목소리를 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결국 1994년 ESRB(Entertainment Software Rating Board)라는 게임 심의 기구가 등장하게 된다.
이후 둠의 화제성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1999년 4월 20일 발생한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으로 인해 다시 언론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총기난사를 저지른 범인들인 에릭 헤리스와 딜런 클리볼드가 둠의 광팬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다시 한번 게임 규제의 요구가 커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드소프트웨어는 유족들에게 피해 보상 소송을 겪기도 했다.
원했던 원치 않았던 둠의 폭력성은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게임이 됐다. FPS의 기틀을 마련했고 최초의 멀티 플레이를 제공했으며, 어둡고 괴기한 디자인으로 수많은 게임과 개발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퀘이크, 언리얼 등으로 불리는 ‘미들웨어’ 엔진 시장 발전도 견인, 시장의 변화를 이끌었다.
둠 시리즈는 1994년 9월 30일 둠 2를 출시했으며, 1995년 에피소드 4를 더한 1편의 확장 편 ‘얼티밋 둠’이 소매점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마스터 레벨 포 둠 2부터 파이널 둠, 둠 64 등 다양한 플랫폼으로 확장됐고 둠 2 이후 10년 만에 둠 3가 2004년 8월 3일 출시되며 정점을 찍었다.
둠 3은 당시 충격적인 그래픽으로 화제를 모았으나 기존 시리즈에서 벗어난 게임성으로 대중의 혹평을 들었다. 이후 확장팩인 악마의 부활로 어느 정도 명성을 되찾았으며, 2016년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리부트 되면서 다시 한번 전 세계 유저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2019년 둠 리부트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이티널’이 출시될 예정이다. 아직까지 둠 시리즈는 공식적으로 한글화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