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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겜노인 Nov 28. 2018

우리는 왜 '게임'을 하는가?

[세상을 움직인 게임] 디지털 놀이 게임

처음 게임을 접했던 시기는 5살 때쯤 아버지가 사 오신 '재믹스'라는 게임기를 통해서였다. 브라운관 화면 속 캐릭터가 내가 조작하는 데로 움직이는 사실이 신기했고 올림픽부터 나름 외형 커스텀 기능이 신기했던 '양배추 인형', 원숭이가 참 미웠던 '서커스', 정말 끝이 없는 줄 알았던 '요술 나무'까지 각양각색의 게임들에 매료됐다. 게임을 할 수 있던 주말을 손꼽아 기다려왔던 나는 밤새 생각해뒀던 공략(?) 방식을 떠올리며 전원을 켰다.


그 후 게임에 빠진 나는 게임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일에 몰두했고 현재까지 게임 관련 일에 종사하고 있다. 과정 동안 항상 게임만을 생각했고 어떻게 보면 지금도 게임만 한 녀석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게임을 즐긴다. 일로 접했지만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게임 일이 아닌 다른 걸 하고 있었다면 더 크게 후회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재믹스도 34년만에 미니로 등장했다. 사고 싶지만.. 실패. <사진출처: 보도자료>


"하지만 20년이 넘는 시기가 지났음에도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바로 게임을 하는 이유다."


오랜 시간 게임을 해왔지만 게임을 왜 하는지에 대해선 한 번도 답을 제대로 낸 적이 없는 것 같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시작했고, 재미를 붙여서 일로써 접하기까지 이런 물음에 대해 묻지도, 아니면 생각해본 적도 없다. 오늘 글은 이런 근본적인 물음에서 시작됐다. 우리는 왜 게임을 하는가.


디지털 놀이가 시작된 시기는 1950년대부터다. 1947년 TV 기술자로 일하던 '토머스 골드스미스'와 에슬 레이 맨은 특허청에 자신들이 만든 '음극관 놀이 장치'의 특허 신청을 낸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쓰였던 레이더 장치 내 떨어지는 미사일을 각종 신호 장치로 조작해 맞추는 게임이었다. 물론 이는 점수 경쟁이나 흔히 아는 게임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형태는 아니어서 이를 최초의 게임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드물다.


1958년 브룩헤븐 국립 연구소에서 일하던 윌리엄 히긴보섬은 연구소를 방문한 손님들이 지루해하는 것을 보고 연구소 내 기술을 바탕으로 유희 요소를 전달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신호 계측에 사용된 5인치 아날로그 오실로스코프에 회로와 간단한 조정기를 연결해 테니스와 흡사한 규칙의 게임을 제작, 선보인다. '테니스 포 투'(Tennis for Two)로 알려진 이 게임이 바로 최초의 디지털 놀이로 불리는 게임의 시초다.

테니스 투 포 실제 모습. <사진 출처: 메가 홈페이지>


이 게임과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세계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https://brunch.co.kr/@jikigame/24)의 인연은 이미 본지에서 다룬 바 있다. 이후 시대는 급변했고 기기 역시 빠르게 발전해나갔다. 1961년부터 생산, 보급되던 최초의 컴퓨터 PDP-1의 등장은 게임은 물론 게임성에 대한 연구가 더해지며 디지털 놀이의 발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MIT에 재학 중이던 스티븐 러셀은 PDP-1을 활용할 방법 중 하나로 게임을 선택, 기획 제작하기 시작한다.


모니터와 키보드 개념이 존재했던 PDP-1은 러셀에게 매우 좋은 교재였다. 그는 당시 푹 빠져 있었던 유명 SF 작가 에드워드 엘머 스미스의 작품을 떠올려 우주를 배경으로 한 게임을 기획했는데 동아리 학우들과 함께 6개월 만에 만들어냈다. 이 게임이 바로 게임의 게임성이 무엇인지 알려준 게임 '우주전쟁' 초기 버전이다. 점 모양의 미사일을 발사해 서로 맞추기 위해 경쟁하는 이 게임은 최초의 대결 게임이자 슈팅 게임이 된다.


이 게임은 러셀이 MIT를 졸업한 이후에도 동아리 TMRC 학우들에 의해 계속 업데이트(?)되어 갔다. 특히 UI부터 게임의 시작, 종료, 승패 여부 등을 알려주는 기능부터 키보드가 아닌 전자식 연결장치를 이용, 조이스틱으로 불리는 주변기기까지 추가됐다. 나날이 강해지는 우주전쟁 덕분에 동아리 방에는 매일 많은 학우들이 몰려와 게임을 즐기고 싶어 했고 교수부터 많은 업계 관계자들의 이목까지도 사로잡는다.

아타리 2600은 북미 비디오 게임 시장의 발전과 쇠퇴를 함께 보여준 기기다. <사진출처: 미니스토옥션>


"이때 우주전쟁 게임에 감명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타리를 만든 놀런 부슈널이다."


이후 1970년대는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 마그나복스 오디세이가 등장했고 1972년 아타리의 대표작 '퐁'(PONG)이 등장한다. 퐁은 당시 비싼 가격에도 높은 인기를 구사했고 이를 즐기고 구경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에 힘입어 가정용 게임기 버전 형태로도 이식됐고 이 역시도 잘 팔리며 아타리의 승승장구를 이끌어낸다. 이때부터 아케이드 시장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


이 시기에 일본의 게임 문화가 문호 개방을 통해 본격적으로 개발, 수출되기 시작한다. 일본은 70년대 중,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아케이드 게임을 개발해 아케이드 센터 및 카페, 대합실 등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중 화제를 띈 게임은 슈팅 게임의 원조로 불리는 '스페이스 인베이더'다. (유쾌한 외계인들의 지구 침공! '스페이스 인베이더' https://brunch.co.kr/@jikigame/14) 이 게임의 등장은 일본 게임 업계의 빠른 성장을 유도하며 갤러그로 대표되는 전설적인 명작들의 등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아타리 2600이 등장하며 북미 내 게임 시장을 더할 것 없는 성장세를 기록한다. 일본 역시 닌텐도와 세가, 남코, 타이토 등 다양한 회사들이 생겨나며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1983년 닌텐도는 자사의 가정용 게임기 '패밀리 컴퓨터'(일명 패미컴)을 일본 내 출시했다. 카트리지 교환식 8비트 게임기였던 이 기기는 지금의 가정용 게임 문화를 정착시킨 일등공신으로 불리고 있는 제품으로 닌텐도의 혁신과 성장을 주도했다.

패미컴도 미니 버전이 나왔다. <사진출처: 보도자료>


아타리 쇼크 편에서도 다뤘듯 패미컴의 등장은 폭망 중이던 북미 게임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오랜 시간 일본 게임 업계가 가정용 게임기 시장 내 입지를 단단히 갖추는 계기가 된다. 85년도 등장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를 시작으로 86년 '젤다의 전설'과 '악마성 드라큘라', 87년도에는 캡콤의 보석 '록맨'과 스퀘어의 명작 '파이널 판타지'가 등장, 전 세계 게임 시장을 강타한다.


게임기도 활발하게 등장한다. 경쟁사 세가는 1986년 세가 마스터 시스템을 미국에 출시했고 유럽과 동남아시아 등 시장에서 대히트를 친다. 이후 1988년 메가드라이브가 등장하고 그 유명한 고슴도치 소닉이 등장한다. 메가드라이브의 등장은 가정용 게임기의 전쟁을 알린 대표적인 상징 사례로 손꼽힌다. 당시 부동의 1위였던 닌텐도를 추월하며 세대의 변화를 알렸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장르가 다양해지는데 역할 수행 게임인 RPG부터 텍스트를 읽으며 진행하는 어드벤처 게임, 슈팅, 액션, 대전 격투, 퍼즐 등 현존하는 대 부분의 장르가 이때쯤 형성된다. 특히 89년은 휴대용 게임기 '게임보이'와 진행형 전설 명작 '테트리스'의 출시 시기다. 이때쯤 한국 내에선 게임 문화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생겨났다.

언제 어디서나 게임을.. 게임보이! <사진출처: 더레이지 홈페이지>


"그리고 그렇게 1990년대가 시작, 본격적인 디지털 문화의 혁명 시대가 열린다"


90년대는 그야말로 게임 산업에선 보석 같던 시기다. PC를 비롯해 가정용 게임기, 저장 매체의 발달, 윈도우 운영체제의 등장, 슈퍼패미컴의 탄생, FPS의 원조 '둠'의 출시, 5세대 콘솔 라인업 세가 세턴과 닌텐도64,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대변되는 3D 게임 시장의 탄생, 명작 어드벤처 게임 시리즈를 탄생시킨 시에라의 급부상 등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환상적인 결과물들이 쏟아졌다. 이후는 온라인 게임의 태동부터 6세대 콘솔의 등장, 모바일 게임 등으로 확장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제 다시 본질로 돌아가 보자. 우린 왜 게임을 하는 것일까. 필자는 게임을 하게 된 배경에는 법과 윤리, 사회적인 규범 때문으로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게임의 시작은 유희였다. 연구소를 방문한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즐기기 위해서 만들었다. 하지만 1972년 상업적인 형태로 확산되면서 게임은 경쟁이라는 가장 큰 목표를 만들어낸다. 누군가보다 더 나은 성적,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 것.

경쟁은 게임의 즐거움을 배가 시켜준다. <사진출처: 센카이닷컴>


그리고 80년대부턴 이 경쟁의 방식이 다양해졌고 90년대에는 확장된다. 온라인 기능들이 들어오며 아케이드 센터의 맞은편 자리가 아닌 서로의 게임기 또는 PC, 휴대용 게임기 앞에서 전 세계 유저들과 경쟁할 수 있게 됐다. 어떻게 보면 게임의 역사는 이런 경쟁을 가속화시키고 부추겨 만들어지고 발전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쟁은 아까 말한 사회적 규범, 법과 윤리라는 틀에서 탄생하게 됐다.


전쟁이 사라지고 냉정이 종식되는 가운데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해야 할 일 등을 만들어냈다. 법치주의가 강화되고 이를 위반 시 징벌받는 제도가 자리 잡게 된다. 게임은 이런 제한적인 사회적 활동 내에서 '일탈'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였다. 게임 내에도 규칙이 있었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경쟁에서 지더라도 -분할 수 있지만-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게임은 현실에서 오는 어떤 심리적인 장벽을 이겨내는 대안으로 자리 잡았고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수단이 된다.


즉 게임을 즐기는 이유를 정리하면 현실적인 제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다른 유저들과 경쟁을 즐기며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수단으로 쓰기 위해서다. 눈에 띄는 점은 게임들의 발전 방향이 즐기는 이유와 비슷하다는 점이다. 나를 꾸미는 아바타나 커스텀 마이징 요소부터 최근에 100명이 함께 경쟁하는 배틀로얄 모드, 전 세계 내 성적을 파악할 수 있는 글로벌 랭킹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맘과 이 기상으로.. 포트나이트는 게임 발전의 정점에 있는 게임 중 하나다.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물론 게임을 즐기는 이유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며 이보다 무겁거나 가벼운 목적이 있을 수도 있다. 이 글은 뭐가 옳다, 그렇다고 보단 우리가 매일 즐기는 게임의 정의, 즉 즐기는 목적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라는 물음에서 시작됐다. 나는 왜 지금 이 게임을 즐기고 있는지.. 우린 이 게임을 언제부터 즐겨왔는지 등 게임을 즐기는 이유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겠다는 취지에서다.


게임과 엮인 무수한 일화부터 추억 등 게임은 어느새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특히 인터넷 문화를 등에 업고 성장한 90년대 세대들은 언제 어디서나 게임을 접하고 게임으로 소통하며, 게임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스트리밍 게임 방송부터 e스포츠 프로게이머 등 신종 직업도 만들어졌고 게임을 평가하고 판단하며 자기 생각을 전하기도 한다. 자, 그럼 이제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왜 게임을 하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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