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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겜노인 Nov 30. 2018

세가의 메가 드라이브는 어떻게 닌텐도를 삼켰나

[세상을 움직인 게임] 세가 메가 드라이브

1988년 10월 29일. 세가는 자사의 '마스터 시스템' 게임기를 능가하는 신형 기기 '메가 드라이브'를 출시한다. 4세대 게임기의 첫 출현이자 세가의 미국 진출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그런 기기로 평가받는 신 제품이었다. 아케이드 센터의 강자가 본격적으로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 승부를 건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가정용 게임기는 보기 좋게 미국 점령에 나서고 있던 닌텐도의 안면에 시원한 '강타'를 날리게 된다.


당시 세가는 닌텐도의 패밀리 컴퓨터(일명 패미컴)에게 밀리며 사실상 자국 내 가정용 게임 시장에서 보기 좋게 연패하고 있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 목을 매는 입장도 아니었고 북미 비디오 게임 열풍에 동참은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성과를 이룬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단연 아케이드 산업에선 괄목할만한 성적을 기록 중이었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는 일명 '안전빵' 사업이 진행됐다.

우리나라에선 현대 컴보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기기다.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하지만 1985년 패미컴이 미국 내 아타리 쇼크를 잠재우며 급부상하기 시작했고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와 젤다의 전설, 동키콩 등 연이은 대히트작이 쏟아지며 승승장구하자, 북미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게임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내부에서 나왔다. 아타리 쇼크로 한 동안 하락세를 면치 못할 것으로 내다봤던 가정용 게임기 시장, 특히 북미 시장에서 닌텐도의 돌풍은 세가에게 신선한 자극이 됐다.


세가는 고심했다. 이미 SG-1000과 세가 마스터 시스템 등 2개의 기기가 자국과 외국 시장에서 연이은 실패를 겪은 상태라 상황만 보고 무리하게 들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북미 시장은 너무 매력적이었고 별 다른 경쟁자가 없는 곳에서 혼자 독식하듯 매출을 올리는 닌텐도의 모습에 질투가 났다. 그리고 1986년 세가는 중대한 결심을 하고 본격적인 후속 가정용 게임기 개발에 들어간다.


"아케이드 기기의 성능을 가정용에서 구현한다"


당시 세가의 주력 아케이드 기판은 '시스템 16'이었다. 이 기판은 메모리와 CPU, 그래픽 칩 등이 최고 수준을 달리고 있었고 빠른 연산 처리 덕분에 슈팅과 액션, 그리고 많은 데이터 인식이 필요한 체감형 게임기 등에 주로 쓰였다. 세가의 임원진은 패미컴이 가진 단점에 대해 분석했고 시대의 발전과 5년 이상을 승부할 게임기를 만들기 위해선 지금을 몇 배 뛰어넘는 게임기를 개발하는 게 필요하다고 내다봤다.

아케이드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게임 '수왕기'를 가정용 게임기로? <사진출처: 게임 캡처>


그러나 시스템 16을 고스란히 이식하는 건 무리였다. 우선 칩의 크기와 기판 때문에 커지는 외형과 과도한 생산 단가는 제품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절충안을 마련했다. 일부 기능을 제외하고 게임 내 꼭 필요한 기능 위주로 간소화시킨 것. 대표적으로 발색 기능은 64색으로 제한했고 스프라이트 기능 일부를 사용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구현이나 처리, 메모리 등 부분도 소폭 낮췄다.


개발 중에도 잊지 않은 것이 있었다. 닌텐도가 북미 시장을 석권한 비결, 그걸 벤치마킹했다. 우선 일본 내 주요 개발사와 미팅하고 비공개 신제품 설명회를 가져 고성능의 제품으로 신작 게임 개발 출시를 부탁했다. 그리고 기술적 지원과 마케팅 지원, 개발 비용 및 로열티 간소화 등 서드 파티에 대한 지원 요소를 대폭 마련해 개발 여건을 활성화시킨다. 서드 파티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세가는 화려한 출발 준비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런 야심 찬 준비에 제동을 건 곳이 있었다. 바로 닌텐도다."


1988년 10월 22일 닌텐도는 일본 내 대형 신작을 선보인다. 바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3'였다. 당시 이 게임은 패미컴의 모든 성능을 집약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뛰어난 게임성과 시각적 완성도를 자랑했다. 또한 방대한 게임 볼륨은 유저들을 사로잡기 충분했고 메가 드라이브 출시는 그렇게 뒷전이 돼 버렸다. 닌텐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언론이나 잡지 등을 통해 공공연히 새로운 신형 게임기를 선보이겠다고 단언했고, 곧 나온다는 일종의 '흘리기 식' 마케팅을 하며 일본 내 메가 드라이브 안착을 방해했다.

이 분의 등장으로 세가의 메가 드라이브 출시는 큰 위기에 봉착한다.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여기에 파이널 판타지 3과 드래건 퀘스트 4 같은 역작이 뒤를 이었고 무수한 패미컴 게임들이 쏟아지며 2년 동안 메가 드라이브를 일본 내에서 묻어버린다. 결국 세가의 반격은 큰 재미를 보지 못했고 자국 내 판매량은 겨우 358만 대에 그쳤다. 출시 초반 부실했던 라인업부터 닌텐도의 물량 공세가 더해진 결과였다. 참고로 당시 '망했다'라는 평가를 받은 PC-엔진의 경우 일본 내에서만 390만 대가 팔렸다. 메가 드라이브의 일본 내 성적이 매우 나빴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세가는 급하게 북미 시장을 공략할 파트너 물색에 들어간다. 하지만 당시 초토화된 북미 비디오 게임 시장 내에는 제대로 된 파트너가 없었고 그나마 나은 곳이 아타리 정도였다. 그러나 메가 드라이브의 북미 출시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세가 입장에선 이마저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래서 단독으로 먼저 1989년 8월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두 군데 선행 판매를 시작한다. 당연히 성적은 좋지 못했다. 세가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세가 북미 지사의 총괄 사장을 새롭게 임명한 것. 그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토머스 칼린스키다.

토머스 칼린스키 전 세가 북미 지사장 <사진출처: 우드드로우 페이지>


토머스 칼린스키는 미국의 유명 장난감 회사 '마텔'의 전 사장으로 그는 오랜 시간 몸 담았던 마텔에서 퇴사해 막 휴가를 떠난 참이었다. 세가가 겨우 수소문해 연락이 됐을 때 그는 가족과 함께 하와이에서 쉬고 있었다. 세가는 임원진을 하와이로 파견해 토머스 칼린스키와 그의 가족을 만났고 오랜 설득 끝에 세가 북미 지사의 대표로 모실 수 있게 된다. 토머스 칼린스키는 세가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몇 가지를 주문한다.


"가격을 내리고, 북미 유저 성향의 게임을 출시해라, 그리고 몇 년 동안 공격적 마케팅을 유지하라"


세가는 이를 수락했고 본격적인 마케팅이 시작됐다. 기존 유명인이나 현재의 얼리어답터, 언론 중심의 마케팅에서 벗어나 대중의 눈에 띄기 위한 전략으로 전환했다. 또한 당시 번들 게임으로 제공되던 '수왕기' 대신 빠르고 메가 드라이브의 성능을 자랑할 수 있는 '소닉 더 헤지혹'으로 교체한다. 당시 세가의 나카야마 하야오 사장은 일부 내부의 반대에도 불과하고 토머스 칼린스키에게 전권을 위임, 그가 북미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돕는다.

소닉의 등장은 북미 유저의 취향을 바로 저격했다. <사진출처: 소닉 더 헤지혹 클래식 캡처>


저작권 문제로 '세가 제네시스'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이 가정용 게임기는 1990년대 초반 조금씩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1991년 8월부터는 시장을 주도하고 있던 패미컴의 판매량을 앞질렀다. 이 반전 스토리에서  가장 큰 역할은 한 건 소닉이었다. 소닉 더 헤지혹은 고성능의 제네시스의 매력을 완벽하게 느끼게 해 줬고 빠른 전개의 액션 게임을 선호하던 북미 유저들의 성향에 정확하게 꼽혔다.


또한 '월컴 투 더 넥스트 레벨'(Welcome to the next level)이나 '블래스팅 프로세싱'(Blast Processing) 등의 자극적인 광고 문구는 아동, 청소년들에게 통했다. 이렇게 시작된 제네시스의 열풍은 1991년 크리스마스 시즌을 시작으로 정점을 찍기 시작해 4년 가까이 닌텐도를 2위로 추락시키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토머스 칼린스키의 미국 시장을 보는 눈이 통했고 그를 믿고 신뢰한 수뇌부의 선택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지고 있을 닌텐도가 아니었다. 1990년 11월 21일 일본 내 출시한 차세대 가정용 게임기 '슈퍼패미컴'을 1991년 8월 북미 시장에 선보였다. 출시명은 '슈퍼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약칭 SNES)였다. 당시 메가 드라이브보다 월등히 뛰어난 그래픽 처리 능력은 물론 패미컴의 전성시대를 이끈 주옥같은 명작들의 후속작을 라인업으로 구성, 세가에게 빼앗긴 1위 자리를 탈환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스파2의 아성도 이분을 넘지 못했다. <사진출처: 게임 캡처>


특히 1992년 출시돼 전 세계를 강타한 캡콤의 격투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2'를 가장 빠르게 이식해 일본 내에서 선두 자리를 유지한다. 그리고 닌텐도의 이런 공격적인 시도는 충분히 북미 시장을 관통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세가 북미 지사의 토머스 칼린스키는 가만히 당할 위인은 아니었다. 이때 꺼내 든 비장의 무기가 바로 '존 매든 풋볼'이다. 이 게임의 등장은 고성능의 슈퍼패미컴을 가볍게 날려버렸고 세가의 북미 천하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하지만 세가의 돌풍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3년 세가는 차세대 게임기 '세가 세턴'의 공개 및 출시 계획을 발표한다. 이때부터 메가 드라이브의 판매량은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고 크리스마스 연말 할인 이벤트로 1994년 연말 시즌을 수성하지만 다음 해부턴 슈퍼패미컴에게 판매량 순위를 내주고 만다. 슈퍼패미콤은 세가의 허점을 놓치지 말고 물량 공세에 들어간다. 그리고 1994년 11월 21일 출시한 동키콩 컨트리가 북미 시장에서 대박을 치며 짧았던 세가의 북미 1위 수성을 빼앗는다. 최종 판매량은 메가 드라이브가 2천100만 대 슈퍼패미콤이 2천335만대로 4세대 게임기 경쟁은 막을 내린다.

이런 요상한 형태의 주변기기가 속출한다. <사진출처: 세가레트로닷컴>


이후 세가는 각종 메가 드라이브 파생 기기를 선보이며 마지막 분투를 짜낸다. 세가 CD를 비롯해 기내용 전용 기기 메가 제트, 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노매드', 그리고 메가 드라이브의 마지막까지 짜낸 슈퍼 32X 등 다소 어이없는 결과물들이 쏟아졌다. 이로 인해 혹평이 나왔고 괜찮던 세가의 이미지마저 좋지 못한 방향으로 평가되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에 세가 세턴을 출시했던 세가였는데 이런 행동들이 없었더라면, 이 노력을 초기 라인업에 쏟았다면 플레이스테이션과 경쟁에서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겠냐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세가의 메가 드라이브는 아타리 쇼크를 넘어 대선전 중이던 닌텐도를 격침한 첫 번째 사례이자 현지 시장에 대한 이해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 사례다. 그리고 서드 파티에 대한 관리부터 효율적인 마케팅 사례 등도 상당히 많이 있다. 그리고 아케이드 시장을 석권하던 명작들의 이식(수왕기, 대마계촌, 스트라이더 비룡) 등을 비롯해 건스타 히어로즈, 샤이닝 시리즈, 소닉 시리즈, 선더 포스 시리즈 등 굵직한 대작도 남겼다. <끝>

그래서 세가 제네시스 미니는 언제 나오는건가요? <사진출처: 에어리어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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