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 있습니까?

함부로 알려하지 말기

by 이명선

나는 군대 얘기가 그렇게 재밌다. 막 전역했거나 휴가 중인 조카들을 만나면 '김병장님 충성!'하고 경례를 한다. 그 소리가 지긋지긋 했을 텐데 착한 조카들은 철없는 숙모에게 웃어준다.

어쩌면 내가 여자이고 군대 갈 아들이 없어서 트라우마도 없으니 누구보다 맘 편히 K-군대 이야기를 즐기고 드라마를 보는 걸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귀한 아들들을 나라에 빌려주고 마음 졸이는 또래 엄마들에게 감사와 위로를 전한다.)


점심챙겨 식탁에 앉으며 텔레비전을 켰는데 띄엄띄엄 보던 드라마 '신병'이 하고 있다. 주인공이 속한 중대가 유격훈련을 하는 스토리였다. 못 봤던 에피소드라 오늘은 그걸 보면서 밥을 먹기로 했다.

레펠 훈련을 하는 장면에서 교관이 묻는다.


-애인 있습니까아?


애인이 있다고 대답한 병사는 애인의 이름을 부르짖으면서 뛰어내린다. 훈련장 가득히 이름이 울리는 여자 입장에서도 애인이라 관계에 동의할지는 알 수 없다.

친구였던 남편이 입대했을 때 우리는 애인 사이가 아니었다. 요즘 말로 하면 썸을 슬쩍 탈 듯 말 듯 하던 사이 정도? 그리고 그 무렵 남편에게는 입대 전까지 썸을 타던 여자가 있었다.

스물한 살의 남편이 레펠탑 위에서 누구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을는지 갑자기 궁금했다.




여기저기 하도 난리들이라 짝짓기 예능을 몇 편 찾아봤다. 웬만한 개그 프로그램보다 재밌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내 눈에는 훤히 보이는 수작이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관전 포인트였다.

이혼하면서 웬간히 질렸을 텐데 자유롭게 연애만 하지 왜 재혼을 하려는지 르겠다.


놀러 온 후배와 예능의 감상평을 나누던 중에 그녀가 '걔들은 솔론데 뭐, 요즘엔 애인 없는 유부녀를 찾아보기 힘들다더라' 했다.

내 주변에는 애인 있는 유부녀가 한 명도 없는데? 그랬더니, '다 비밀로 하니까 없는 거지'라고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다들 비밀로 하는데 요즘에 애인 있는 유부녀가 많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대?'

후배는 내 질문에 어이없어하면서 뾰족한 답은 주지 않고 가 버렸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그만큼 배우자 외에 애인을 따로 두거나 두고 싶은 기혼자들이 많아졌다는 말일 것이다. 아니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비율인데 '나 애인 있다'라고 밝히는 사람들이 늘어난 걸지도 모른다.

곰곰 입속으로 불러 보면, '애인'이라는 단어는 왠지 처량하다. 나는 누군가를 애인이라 생각하는데 상대는 나를 애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비참한 스토리가 먼저 떠오른다.

반면에 '연인'이라 부르면 두 사람이 다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는 관계에 더 적절한 이름 같다. 그리고 사극에 자주 나오는 '정인'이라는 말은 연인이 확보한 상호성에다 뭉클한 감동까지를 보탠다. 우리가 '부부는 사랑이 아닌 정으로 산다'고 하는 그 '정'을 단어에 못 박아 두어서 오랜 세월을 지켜낸다는 느낌까지 내포한다.


애인이든 연인이든 정인이든 뭐라 부르든지 기존의 배우자에다 추가로 가지는 대상은 곤란한 존재다. 어떤 곤란인지는 케이스가 다르고 너무 광범위해서 굳이 말할 필요는 없고, 흡연은 시작하지 않는 게 상책인 것처럼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것이 속 편하다.

그러나 '그의 존재로 인한 곤란 따위는 그가 주는 위안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어'라 나오면 말릴 도리는 없겠다.



배우자가 죽고 혼자 남은 노년의 애인 이야기를 최근에만 몇 군데서 들었다. 네이트판이나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 주변 어르신들의 이야기다.

70대 후반이나 80대에 배우자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는 건데 특히 아내가 먼저 돌아가시고 남은 남편의 경우가 많았다.

내 또래 자식들이 염려하는 것은 대부분 재산 문제다. 시아버지가 시어머니 죽고 일 년 만에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거의 사실혼 관계로 보여 걱정이다. 워낙 비주얼 좋고 인기 좋은 친정아버지가 엄마 돌아가시고 새 여자친구를 사귈까 봐 걱정이다.

이 걱정들의 이면에는 아버지 명의의 집과 연금이 있다.

남겨줄 것이 하나도 없는 아버지의 끝사랑이라면 오히려 큰 걱정은 않겠지만 '나 데이트하게 돈 좀 더 다오'라 할까 봐 잔잔한 걱정은 또 있을 것이다.


당장 내게 닥친 일이 아니라 그런지, 나는 '아버지의 새 연인이 던지는 금전적 리스크' 쪽보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 죽지 않는 연애 감정'에 꽤 놀랐다.

- 와, 80에도?

- 얘는 뭔 소리니, 울 아부지 보면 90에도 똑같아.


장가가고 나서부터 지 부모 몰라라 한 친정오빠들 역할까지 다 하고, 엄마 병 수발도 오래 한 막내딸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상가 건물을 50대 애인에게 줬다는 할아버지도 봤다. 순둥이 막내딸 부부는 로맨티스트 아버지를 다시는 안 보겠다고 선언했다.

'애인 있습니까?'라 질문은 가벼운 게 아니었다.

남에게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 함부로 묻지 말기다. 가 열 살이든 아흔 살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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